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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

[일상] 낡은 책



낡은 책

낡은 책이 가진 빛바램과 촌스러움이 좋다. 내가 가진 책 중 가장 ‘낡아 보이는 책’은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다. 스무 살 중턱에 읽었던 그 책은 그 무렵 비행기 옆자리에서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시작하는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2005, 생각의 나무)를 읽고 알랭 드 보통에 푹 빠져 고른 다음 책이 ‘불안’이었다. 풍부한 심리묘사로 불안하고 깜깜하던 나의 이십 대를 위로해주던 그 책. 하도 들고 다녀서 표지도 위아래 모서리도 너덜너덜, 심지어 커피인지 차인지 모를 음료도 쏟아 얼룩도 있다. 더럽게 낡았지만 차마 버리지 못한 건 이 책이 불안하디불안하던 이십 대의 나를 위로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이 되기 전, 청계천이 지금의 깨끗한 모습이 아닌, 고가도로와 헌책방도 있던 시절에 청계천 헌책방을 종종 다녔다. 각각의 책은 전주인의 사연을 담고 있다. 요즘은 오래된 헌책방을 찾기가 어렵다. 헌책방을 찾아가는 사람도 드물기도 하고 헌책방이 보유한 책은 정말 ‘헌책’이 대부분이다. 시중에 너무 많이 나와 있거나, 너무 오래되어 쓸모를 잃은 책. 부산여행 때마다 들리는 보수동 책방 거리는 점점 규모가 작아짐을 느낀다. 그 지역을 지키는 사람들도 찾는 사람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일 테지.

각자의 추억을 사고팔던 헌책방의 책거래는 ‘중고서점’이라는 공간에서 새로운 거래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낡은 책이 아닌 깨끗한 책들이 세련된 방식으로 거래된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새 책은 약간 비싸게, 인기가 없는 책은 약간 싸게, 너무 많은 물량을 보유한 책은 받지도 않는다. 전주인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던 헌책방의 책과는 다르다. 많이 사면 덤을 끼워주는 사장님의 정도 없다.

편리하고 익숙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거래가 나쁘진 않지만, 책방 사장님의 후덕한 인심과 추억이 가득하던 그 공간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건 아쉽다. 나도 낡고 쓸모없어지면 잊혀지고 버려지게 될까 봐.

낡고 오래된 것의 소중함을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글을 쓰다가 하고 싶은 게 하나 더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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