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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고 또 읽기/문학2020. 3. 30. 23:59

[2020-13] 삼국지 첩보전 2.안개에 잠긴 형주. 허무 지음. 홍민경 옮김. 살림출판사. (2020)

삼국지 첩보전은 총 4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삼국지를 기반으로 한 역사 추리소설이다. 그중 2권 ‘안개에 잠긴 형주’는 형주성에서 벌어졌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삼국지 첩보전’ 속 비밀 조직인 위나라의 진주조, 촉나라의 군의사, 오나라의 해번영을 중심으로 주인공 가일과 주변 인물인 우청, 손몽, 부진 그리고 가장 비밀스러운 인물 한선은 삼국지에서는 볼 수 없는 인물들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가공된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와 진짜 삼국지의 이야기, 유비의 명을 받들어 형주를 지키던 관우가 여몽에게 죽음을 당하기까지의 이야기가 절묘하게 섞여 있어 삼국지 원작에 대한 이해가 적은 내가 읽어내기에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가 거짓, 아니 허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만큼 실감 나는 상황 묘사와 흡입력 덕분에 숨을 죽이고 다음 장을 넘길 수 있었다.

위, 촉, 오나라의 경계의 중심지이던 ‘형주’는 2020년을 사는 우리에게는 코로나19의 발원지로 더욱 유명한 우한 지역의 옛 지명이기도 하다. 중국 역사에서 의미가 있는 지역이 코로나로 오명을 쓰게 되었으니 아쉽고 안타까울 뿐이다.

일개 역사 추리소설 속 등장인물도 서로를 속고 속이고 눈치싸움(?)이 빈번하게 만들어내고 있는데, 코로나19 이후로 보여지는 혼란스러운 국내 정치 상황에 빗대어 볼 때 단순히 눈에 보이는 상황만으로 전체를 판단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국지 첩보전을 읽으면서 책 속 등장인물처럼 명석하지 못한 보통 사람에 불과한 내가 알 수 없는 새로운 세상이 존재할 것만 같다. 해리포터와 나니아 연대기 같은 판타지 소설을 읽은 기분이 든다.

하나라도 놓치면 흐름을 잃게 되는 많은 이야기와 4권이라는 부담감 덕분에 빠르게 읽을 수는 없었지만 다음 장이 궁금하고 다음 권이 궁금한 시리즈물이었다. 삼국지를 좋아하고 추리소설을 좋아한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의 만물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습니다. 무엇도 영원한 것은 없지요. 예전에 누구의 것이었든, 그런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세상도 변하고, 그의 것이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게 됩니다. 장군은 왜 집착을 내려놓지 못하십니까? 장군이 그것을 내려놓는 순간 몸과 마음이 편안해질 겁니다. (118)

Posted by 따듯한 꽃.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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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고 또 읽기/인문2020. 3. 29. 21:57

[2020-12/인문학, 글쓰기] 소설을 살다. 이승우. 마음산책. (2019)

왜 나는 내 고향이 떳떳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내가 떳떳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떳떳하지 않았을까. 아, 나는 죄를 지었다. 존재의 기반을 폐하고자 하는 나의 낡고 오만한 자의식은 시간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시간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고향과의 거리가 반대로 좁혀지는 것을 느낀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나의 문학이 고향을 향해 나아가는 낌새를 챈다. 고향이 어찌 한낱 산천이겠는가? 고향은, 말하자면 위대한 서사의 공간이다. 나무 나무마다에 기억이 잠자고 있고, 길모퉁이마다에 이야기가 숨 쉬고 있다. 고향이 어찌 한낱 자연이겠는가? 고향은 기억의 근원인 것을, 존재의 밭인 것을. 문학이 그것을 어떻게 외면하겠는가. (29)

자유가 사랑으로 행해지고 사랑이 자유로 행해져서, 서로가 서로 속으로 깃들면서 행해질 수만 있다면야 사랑이고 자유고 굳이 나눠 따질 일이 없겠지만, 이 섬에서 일어난 일들로 해서는, 자유라는 것 속에 사랑이 깃들기는 어려웠어도 사랑으로 행하는 길에 자유는 함께 행해질 수가 있다는 조짐을 보였거든.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문학과 지성사, 1976 (40)

모든 소설은 자전적이다. 그리고 모든 자전적인 소설들은 가면을 쓰고 있다. 물론 그 가면은 춤을 추기 위한 가면이다. 춤을 추기 위해서 가면을 쓴다. 가면을 벗으라는 요구는 따라서 부당하다. 춤을 끝낼 때가 아니고는 가면을 벗지 않는 법이다. 나는 내 소설의 마지막에 이렇게 써두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글쓰기는 감춰진 것의 드러내기이다. 그 드러내기는 그러나 감추기보다 더 교묘하다. 그것은 전략적인 드러냄이다. 말을 바꾸면 그는 감추기 위해서 드러낸다. - 이승우, ‘생의 이면’, 문이당, 1995 (84)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산만하고 상상력이 동굴처럼 캄캄해질 때면 물을 보러 간다. 강변 둑을 걷거나 강이 잘 내려다보이는 커피 집에 앉아 통유리를 통해 물을 바라보곤 한다. 물은 그냥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만지거나 그 안으로 들어가면 금방 형체를 무너뜨려버린다. 그것은 물이 간섭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은 구상의 공간이 아니다. 자연은 생각 자체를 지워 없앰으로써 자연 안에 들어온 자를 강복한다. 강물 속에 문학을 담그고 나는 내 문학에게 세례를 베푼다. 물속에 잠김으로써 옛 문학은 죽고 새 문학이 태어나리라.....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세례의 일회성을 믿지 못하는 엉터리 사제다. 세계는 거듭거듭 끝없건만 문학은 낡은 채로 그냥 있다. (95)

저자 이승우는 195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울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공부했다. 1981년 ‘에리직톤의 초상’으로 <한국문학> 신인상에 당선되어 작가로서 등단했다. 여러 소설, 산문집을 내었다.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서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다수의 작품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결혼했고 남양주에 산 적이 있으며 현재는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책날개 참고)

‘맛의 기억’이라는 제목의 단행본, 2019서울국제도서전의 기념품 같은 책 속의 짧은 글에 반해 연초부터 몇 권을 연달아 읽고 있다. 처절하게 사랑할 줄 아는 젊은이인 줄 알았는데 부모님뻘 아저씨였다. ‘소설을 살다’는 소설가로 살아온 작가의 일상과 소설에 관한 생각을 담은 산문집인데 이 또한 소설 같다. 단편이거나 연작처럼 느껴진다. 3월 초에 읽었는데 리뷰를 빨리 쓰고 싶지가 않았다. 이 책을 빨리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멋쟁이 소설가 이승우님의 새 책을 또 읽고 싶다. 나 같은 보통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런 글을 쓸 수 없겠지.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Posted by 따듯한 꽃.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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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고 또 읽기/문학2020. 3. 29. 20:10

[2020-11] 삼국지 첩보전 1.정군산 암투. 허무 지음. 홍민경 옮김. 살림출판사. (2020)

초등학생 시절 5권짜리 만화책 삼국지를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다. 유비와 관우, 장비, 제갈공명, 조조 등 위, 촉, 오나라의 삼국통일 이야기에 빠져 몇 번이고 다시 읽던 기억이 난다. 성인이 될 때까지 삼국지를 또 읽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몇 년 전 경영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조조를 담은 책, ‘조조에게 배우는 경영의 기술(시그마 북스, 2016)’을 보면서 기억이 전부 옳은 건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내 기억 속 조조는 나쁜 놈이었는데 다른 시점으로 바라보니 다른 이야기가 보였다.

‘삼국지 첩보전’은 총 4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저자 허무는 중국의 미스터리 작가로 주목받았고, 오랫동안 ‘삼국지연의’를 고증하여 이 소설을 만들어냈다. ‘삼국지연의’가 양지의 이야기라면 ‘삼국지 첩보전’은 음지의 이야기이다. 1권은 정군산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군산 전투’는 219년 유비가 한중을 차지하기 위해 하후연이 지키던 정군산을 공격한 전투이며, 촉이 승리하고 유비가 촉의 첫 황제가 된 결정적 역할을 한 전투이다. 위, 촉, 오 삼국에는 자국의 비밀병기처럼 운영하는 진주조(위), 군의사(촉), 해번영(오)이 있다. 이 첩보 기관 사이의 은밀한 정보 전쟁이 정군산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베일 속 첩자로 등장하는 ‘한선’이라는 인물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신이 살펴보니 ‘춘추’에서 전대에 이미 일어난 일들을 돌아보고 하늘과 인간 세상의 관계를 깊이 있게 분석한 결과가 꽤나 놀라웠습니다. 한 나라가 도에 어긋나는 일을 하려 하면 하늘이 먼저 재해를 내려 그것을 경고하고, 그럼에도 반성하는 빛을 보이지 않으면 기괴한 일을 내려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그럼에도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재앙과 멸망이 닥치게 될 것입니다. (52)


코로나19 바이러스 전쟁(!) 시국에 ‘정군산 암투’ 책을 읽으려니 이상하게 감정 이입이 잘 되면서 200년대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음모가 가득한 세상, 잔인한 전투 묘사가 썩 유쾌하진 않았다. 그때는 시민의 인권 보장 같은 것도 없고, 정보공유도 어려웠겠지. 국가의 지도자나, 장군, 귀족 급이 아니어도 소소한 누림을 누릴 수 있는 2020년에 살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이런 소설 따위에 감정 이입해서 현재에 감사하는 작고 작은 내가 보였다.


모든 인간사는 하늘의 뜻에 달려 있으니 사람으로서 할 일을 다 했다면 그저 겸손하게 그 뜻을 기다려야 한다.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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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경제경영, 마케팅] 작은 회사의 마케팅은 달라야 한다. 이연수. 문인선. 미니멈 출판사. (2020)


계획 변경을 실패로 여기지 않아야 한다.

2020년 봄, 코로나19로 인한 위기 상황은 너무 막막하다. 누군가 일부러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뚜렷한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겪고 있는 이 어려움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어느 하나 쉬운 게 없다. 이 와중에 좋은 생각을 하려고 시선을 돌리다 만난 ‘작은 회사의 마케팅은 달라야 한다.’는 힘겨운 이 시기에 만난 선물처럼 느껴졌다.

이 책은 이연수 문인선 두 명의 공동 저자가 쓴 책이다. 이연수는 언론인 출신의 홍보마케터이자 문화기획자 및 국제행사 전문가이고, 문인선은 공익재단 온라인 마케터 및 사회공헌 전문가이다. (책 소개 참고)

‘뛰어난 기술만 있으면 성공한다.’,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운영하면 된다.’ 같은 말은 요즘 세상에서는 결코 조언이 될 수 없다. 이마트나 대기업 편의점 등으로 이미 동네 슈퍼가 사라진 지 오래다. 대기업, 다양한 프랜차이즈들이 넘치는 세상에서 소상공인, 작은 회사의 순진하고 절실한 마음가짐 따위로 원하는 것을 지켜낼 수는 없다.

저비용으로 최대 홍보 효과를 만드는 방법, ‘스토리텔링’이 중요성, ‘SNS’를 효과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 등 홍보 마케팅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넘쳐나지만, 정작 무엇을 언제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무엇이 필요한지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특히 소상공인, 스타트업, 1인 기업가, 프리랜서, 비영리재단 등 홍보를 전담하는 인원이 없는 곳에서는 홍보란 더욱더 어렵고 버거운 분야이다. 이 책은 작은 회사가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홍보마케팅의 a부터 z까지를 담고 있다. 너무 많은 정보가 담겨있어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무엇을 당장 실천하기는 어렵겠지만, 홍보마케팅에 관심이 있고, 시도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활용 가능한 정도의 깊이와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의 강점은 저자가 한국인이자 실무자라는 점이다. 유명하고 훌륭한 번역서는 번역자의 섬세한 통찰 없이 공감하기 어렵다. 특히 예를 든 부분이 우리나라 상황과 맞지 않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경험이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인천대교’ 홍보마케팅을 담당했던 실무자로서 익히고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엮은 책이어서 막연하거나 이론적인 부분만 다루지 않고, 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개인적으로 7장, ‘위기 때 더 빛을 발하는 홍보’ 부분이 의미 있게 느껴졌다. 홍보마케팅은 ‘내가 가진 무기를 효과적으로 돋보이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지 ‘위기관리’까지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코로나19 같은 위기 상황을 준비해온 회사나 사람도 드물겠지만, 시련은 언제든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매뉴얼을 만들고 관리해야 한다는 새로운 가르침을 얻은 것이 참 좋았다.

작은 회사를 운영하거나 전문가의 도움 없이 무언가를 홍보해야 한다면 곁에 두고 오랫동안 살펴봐도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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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고 또 읽기/문학2020. 3. 18. 15:00

[2020-09/소설, 독일문학] 개가 인간과 통하는데 꼭 필요한 대화 사전. 오셀로. 이형진 그림. 선우미정 옮김. 율리 체 받아 적음. 들녘. (2008)

 

2020년 초, 율리 체의 '새해'를 읽고 작가의 전작을 살펴보고 싶다는 호기심으로 도전한 책인데 저자명에 '오셀로'라고 쓰여있다. 율리 체와 오셀로는 어떤 관계지?

 

이 글을 쓴 오셀로는 여류작가의 개다. 작가를 주인으로 둔 덕에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마침내 견공들이 인간의 언어를 정확히 이해하면 할수록 오해의 소지가 줄어들며, 견공과 호모사피엔스의 공생도 훨씬 수월해지고 행복해질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오셀로는 '개가 인간과 통하는 데 꼭 필요한 대화 사전'을 통해 견공의 시각에서 본 인간의 세계를 유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율리 체 받아 적음.

 

 

이 책은 소설가 율리 체의 독특한 발상과 시선이 담긴 '반려견 생활 탐구 백과사전'이다. '오셀로'라는 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사를 ㄱ부터 ㅎ까지 사전의 형식으로 설명한다. 그림작가 이형진의 자유로운 그림체와 찰떡궁합을 이루고 있다.

저자는 오셀로의 마음속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는 듯 개의 시선으로 본 인간 세상을 위트 있게 표현한다. 한국에서만 살아본, 한국인의 정서로 읽다 보니 공감할 수 없는 유럽? 독일식 유머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이건 그저 허구일 뿐. 부담 갖지 않고 그저 소설처럼 느끼는 대로 읽으면 된다.

반려견과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시라. 율리 체라는 작가에게 매력을 느낄 것이다. 난해한 편집 덕분에 가독성이 좋지 않지만 이 차도 저자 오셀로의 의도일 수 있으니 받아들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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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고 또 읽기/문학2020. 2. 28. 23:34

[2020-08 / 소설] 새해. 율리 체. 이기숙 옮김. 그러나 출판사. (2019)


슈피겔 종합 1위, 16개월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소설, ‘새해’
휴양지의 호텔 같은 예쁜 일러스트를 표지에 이끌려 읽게 된 ‘새해’는 독일 작가 율리 체의 2019년 신간이다. 율리 체(1974~)는 독일의 본에서 태어나 파사우와 라이프치히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미국의 뉴욕과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 장기간 체류하며 데뷔작 ‘독수리와 천사’(2001)가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기타 소설들도 35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다. 2002년 라우리스 문학상부터 여러 차례 문학상을 받은 작가이다. (책날개 참고)

법학을 전공하고 유럽법과 국제법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 쓴 소설이라니. 연결고리가 독특하다고 생각하며 책장을 넘겼다. 깔끔한 표지와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과 내용 구성 등에서 자신감이 느껴졌는데, 역시나였다.

주인공 헤닝이 자전거를 타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자전거로 언덕길을 올라가는 한 사람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질 만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보통 글에서 생각을 담을 때 ‘작은따옴표’를 사용하고, 대화를 담을 때 “큰따옴표”를 사용하곤 하는데 그런 구분 없이 사실 묘사와 주인공의 생각을 넘나들며 왔다 갔다 한다. 그 부분이 어렵거나 헷갈린다기보다는 좀 어지러웠다. 마치 힘든 자전거로 오르막길을 올라갈 때 숨이 차고 머리가 띵해지는 그런 기분. 아마도 ‘그것’의 정체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나 싶다.

소설의 초반부에 시점의 이동인지, 상상인지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하느라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했다면 중반부 이후부터는 순식간이다. ‘그것’의 실마리를 찾아내고, 결말까지 너무 빠르게 훅 지나와버린 기분이다. 자신의 글에 확신을 가진 작가의 자신감이 느껴졌다. 공포나 호러 소설은 아니지만, 더한 고통스러움이 있다. 주인공 헤닝과 같은 경험을 해본 적이 없지만, 누구든 그런 상황을 직면하게 된다면 누구든 갖게 될 공포. 그래서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

어린 시절의 아픈 경험이 한 사람에게 얼마나 강한 트라우마로 남게 되는지, 그것을 극복하기까지 얼마나 큰 노력이 필요한지가 담겨있어 책장을 덮은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그 여운이 남아있다. 이해하기 어렵지 않으면서 괜찮은 소설 한 권을 읽었다.

Posted by 따듯한 꽃.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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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5/에세이] 마흔의 서재. 장석주. 프시케의 숲. (2020)


<마흔의 서재>는 물안개 자욱한 새벽 마당을 가로질러 서재로 나가 써 내려간 그 시절의 조촐한 마음을 담은 책이다. 그때 찾아 읽은 책과 나를 품었던 서재는 나의 피난처이자 은신처였다. 갈매나무 한 그루 품지 못한 채 마흔에 불시착한 이들에게 나침반 같은 책이기를 바랐다. 살아온 날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다가올 날의 꿈을 기획하는 이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길 바랐다. 미망과 의혹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기. 깨어 있을 땐 숨결을 가지런하게 하고 밤에는 작은 꿈들을 꾸며 고요하게 살기. (7)-작가 서문 중에서


2012년 한빛비즈에서 출간한 동명의 책 ‘마흔의 서재’가 출판 계약의 법적 시한을 다 채운 2020년 1월 프시케의 숲 출판사에서 다시 출간되었다. 저자 장석주가 마흔이던 시절 읽고 쓰고 느낀 것들을 엮은 이 책은 어떠한 울림을 주었길래 8년 만에 또다시 나오게 되었을까. 출간된 지 이제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베스트셀러에 속해있다.


‘마흔의 서재’는 장석주가 마흔을 맞이하며 읽은 책을 소개하고 본인의 생각을 덧붙이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책 속 소개되는 저자가 읽어낸 수많은 훌륭한 책 보다 저자의 생각에 더 공감하고 감동받았다.

-목차-

제2장 삶의 갈림길마다 책이 있다.
제3장 이전과는 다른 생이 기다린다.
제4장 넓어지지 말고, 깊어지는 삶을


성인으로 불리는 나이가 되면 좋은 스승님을 만나기가 어렵다. 물론 학창 시절에도 좋은 스승님 만나기는 하늘에 별따기지만, 교육기관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더하다. 생계를 살다 보면 그저 살아가기에도 급급하고, 점점 여유가 없어지는데 마흔이 아마 그 중턱쯔음 되나 보다. 열심히 일하며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이룬 건 없고, 돈을 좇으며 살아온 건 아니니까 적은 게 당연한데 남과 비교하게 되고, 방향을 잃으니 더욱 혼란스러운 시기가 바로 마흔인가 보다. 나의 마흔은 남들과는 다를 줄 알았는데. 무엇을 위해 이토록 열심히 살아왔나 허무해진다. 뭐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더욱 열심히 살아보지만, 그동안 마음먹은 대로 살아왔던 건 내 인생의 축복이었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무튼 마흔이라는 새로운 성장통을 맞이하게 되어 힘겨운 사람들에게 나침반 같은 스승님이 되어줄 책이다.


저자는 마흔 시절에 이 책을 쓸 만큼 단단하고 야무진 사람인데 나의 마흔은 여전히 아직도 어설프다. 마흔쯤이 되면 남들처럼 어른처럼 살 줄 알았는데 나의 마흔은 그렇지 못하다. 얄궂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덕분에 업무가 휘청거려 책에 집중하기가 어려웠지만, 다시금 정신을 붙잡고 나아가야겠다.

——

자발적으로 선택한 고독은 일상의 분주함에서 벗어나 “심리적 피난처”를 찾는 일이다. 대개 작가나 예술가들이 창작을 위해 스스로 고립의 환경을 찾아내 고독을 추구한다. 이때 고독은 “위안과 새로운 활력, 내적 평온”이라는 선물을 준다. 명상, 휴식, 기도와 같은 활동도 고독을 동반한다. 이때 고독은 일상의 번잡함에 매여 지친 영혼을 달래고 내적인 여유와 평화를 가져다준다. (74)

대부분의 갈매기들은 비상의 가장 단순한 사실-즉 먹이를 찾아 해안을 떠났다 다시 돌아오는 방법 이상의 것을 배우려고 마음 쓰지 않는다. 대부분의 갈매기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나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갈매기에게 중요한 것은 먹는 것이 아니라 나는 것이었다. 어떤 것보다 조나단 리빙스턴은 나는 것을 사랑했다. -리처드 바크, <갈매기의 꿈>(129)

비가 내리는 풍경에 무심한 눈길을 주고 있는 이 순간, 그 순간들이 바로 삶이라는 꽃이 피어 있는 순간이다. ‘나’란 존재는 바로 이 순간의 순수의식 그 자체이다. 이 순간밖에 없는 삶은 없다. 산다는 것은 바로 이 순간에 온전히 집중해야 하는 일이다. (178)

나는 삶을 소유할 수 없다. 삶 그 자체가 바로 나이고 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180)


——
장석주와 연관된 책을 5권이나 읽었다. 옛 기록을 찾아보니 내가 만난 장석주의 책은 모두 좋았다. ‘마흔’이라는 제목에 끌려 손이 간 줄 알았는데 역시 장석주의 글이어서 더욱 마음이 기울었나 보다.

1. 은유의 힘. 장석주. 다산책방. (2017)
2. 내 아침 인사 대신 읽어보오. 장석주. 박연준. 난다 출판사.(2018)
3. 게으름의 즐거움. 피에르 쌍소 외 지음. 함유선 옮김. 호미 출판사. (2003)
이토록 멋진 문장이라면. 장석주 쓰고 엮음. 추수밭 출판사. (2015)
5. 정원으로 가는 길. 질 클레망. 이재형 옮김. 홍시 출판사. (2012)

Posted by 따듯한 꽃.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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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고 또 읽기/문학2020. 1. 27. 16:42

[2020-04 / 문학, 한국소설] 사랑의 생애. 이승우. 예담. (2017)

사랑은 모든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게 하는 근거이다. 사랑의 근거이고 사랑의 깊이이고 사랑 자체이다. 세상의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근거이고 깊이이며 사랑 자체인 사랑 없이는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을 품고 있다.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 안에 포섭되어 있다. 사랑 자체인 이 사랑이 두 사람 사이로 들어와 자기 생애를 시작한다. 그 생애가 연애의 기간이다. 어떤 생에는 짧고 어떤 생애는 길다. 어떤 생애는 죽음 후에 부활하고, 어떤 생애는 영원하다. (167)


2019서울 국제 도서전 기념품(?)이었던 '맛의 기억(다양한 분야의 작가들이 맛에 대한 이야기를 엮은 소책자)'을 통해 이승우라는 소설가를 알게 되었다. 언어를 가지고 노는(!) 저자 특유의 필력에 반해 이승우의 여러 책을 담아왔고, 그중 첫 번째로 완독한 책이다. 작가는 저자의 말을 통해 '떠오르는 대로 순간의 단상들을 적어둔 여러 개의 메모들을 여러 권의 몰스킨 수첩을 거쳐 스마트폰의 메모장으로 옮겨 왔다가 책으로 만들었다.'라고 소개한다. 저마다 다르지만 비슷하고 비슷하면서도 다른, 사랑이라는 경험의 신비를 담은 책이다.


'사랑의 생애'는 등장인물 형배, 선희, 영석, 그리고 준호의 사랑 이야기가 우연하게 얽혀있다. 각자 자신만의 어쩔 수 없는, 치열하고 못나빠진 날것의 사랑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만, 저마다의 사정에 공감되는 것은 작가 이승우의 솜씨 덕분일 것이다. 글을 읽는 내내 때로는 형배에게, 때로는 선희에게, 영석, 그리고 준호에게 감정이입하여 내가 그 사람인 듯 몰입하여 읽을 수 있었다. 한 사람의 감성, 심리 묘사가 너무나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어 한때 즐겨 읽던 알랭 드 보통이나 김형경의 소설을 떠오르게 한다. 내 감정을 들킨 것만 같은 이런 묘사는 마음이 바쁠 때에는 잘 읽히지 않다가 여유가 있고, 한가한 시기에 후루룩 읽게 된다.

어떤 방식이 더 좋거나 괜찮다고 말할 수 없는 각자 사랑에 대한 경험, 사랑의 생애는 작가의 말마따나 사랑 그 한가운데 빠져 있는 자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다. '진정으로 살지 않는 자가 삶이 무엇인지 묻는다.'라는 글귀가 마음에 남는다. 책을 읽으며 사랑이 하고 싶어졌고, 삶이 궁금해졌다.

분명하고 알아듣기 쉽게 고백하기가 쉽지 않다. 사랑하는 자의 말은 불가피하게 우회하는 말이다. 사랑의 말은 직선을 모른다. 아니, 모르지는 않지만 쓰지 못한다. 쓰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두근거림과 조심스러움, 즉 수줍음이 쓰지 못하게 한다. 직선의 언어는 빠르지만 날카로워서 발화자든 청자든 누군가를 다치게 하기 쉽다. 자기든 남이든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이 시작되는 현장에서 직선의 언어는 여간해서는 채택되지 않는다. (48)

가치를 부여하는 일은 사람마다 다르다. 이 사람이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라고 저 사람도 반드시 그래야 하는 법은 없다. 이 사람에게 대단한 일이 저 사람에게는 대단하지 않거나, 저 사람에게 하찮은 일이 이 사람에게는 엄청나게 중요한 일인 경우는 허다하다. 기쁨과 보람을 느끼며 하는 일에 우리는 가치를 부여한다. (...) 우리는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하는 대단한 일을 하며 살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 순간을 기다리면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일을 견딘다. 그 대단한 일을 하기 위해, 혹은 그 일을 하기를 갈망하며 이 대단하지 않은 일을 한다. 이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 건 그 일 때문이다. 그 일에 대한 기대가 이 일을 감당하게 한다.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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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고 또 읽기/문학2020. 1. 21. 01:34

[2020-03 / 문학, 한국소설] 서독 이모. 박민정. 현대문학. (2020)


요즘은 수많은 근심 걱정으로 책 읽기가 쉽지 않은데, 서독 이모는 예외였다. 큰 기대 없이 책장을 넘겼다가 앉은자리에서 단숨에 끝까지 읽어버렸다. 흡입력이 좋고 재미있으면서 명쾌(!)하지만, 마냥 가볍기만 한 것도 아니라 곱씹을 거리도 있다. 서독 이모는 1985년생 작가 박민정의 소설이다. 소설에 있어 나이라는 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기준이 되어버리니 ‘나보다 어린 작가’가 되었다. 어리면서 잘 나가는 대부분 사람들의 소설은 전개가 빠르거나 소재가 자극적이어서 불편한 경험이 많았다. 도도하고 거친 느낌이 싫어서 웬만하면 피하는 편이다. 하지만 박민정의 소설은 그런 나의 선입견을 깨트렸다.


소설 속 주인공 정우정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대학원을 졸업하기 위해 구질구질한 대학원 생활을 버티며 논문과 소설을 쓴다.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소재를 찾다가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인 이모와 이모부 이야기를 선택했고,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허구인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쓴 글과 석사 논문 통과 과정인 자신의 이야기가 소설이 되었다. 흥미롭다. (이런 과정을 책 뒤편에 드라마투르기라고 표현한다.)


드라마투르기는 작품에 대한 여러 해석 중 하나의 관점을 채택하여 작품에 의미를 구체화하는 비평적 활동이다. 즉, 하나의 스토리에 대한 비평적 시선 및 연출을 위한 이론적 실천이다. (106)


너에게는 이모의 불행이 심심풀이 땅콩이니, 나는 엄마의 말을 떠올렸다. 두 번째 단락을 넘어서고 나서도 꽤 많은 분량을 단숨에 써버렸지만 더는 이 이야기를 이어 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82)


나의 쓰기도 떠올랐다. 고작 나의 경험과 내 주변 이야기를 쓰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미천한 글짓기가 부끄러웠지만, 정우정, 아니 박민정 작가처럼 나도 할 수 있다면 계속 쓰면 작가가 될 수 있으려나?!


소설 속 작가는 본인의 가족사, 서독과 동독의 통일에 엮인 비극, 정체성과 삶, 씀이라는 행위 등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결코 무겁지만 한 건 아니다. 이 소설에 재미가 더해지는 것은 통일 전후 독일과 현재 한국의 상황이 오버랩되는 점이다. 정우정이 박민정은 아닌지, 이 소설 자체가 진실인지 허구인지 궁금증을 갖고 ‘서독 이모’를 읽으며 최근 재미있게 보는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떠올랐다. 현실에서 일어날 것 같지 않은 통일 같은 소재를 독일 이모와 그녀의 남편 클라우드의 이야기를 통해 불쑥 차용한다는 점에서 더욱 드라마처럼 느껴졌다. 소설 속 이야기들이 너무나 거짓말 같은데 그래서 더욱 진짜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이렇게 덜컥 통일이 이루어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책날개 참고)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 선은 현재 021권까지 발행되었고, 30권까지 예정되어 있다. 어떤 출판사에서 이렇게 앙큼(!) 발랄한 책을 시리즈로 묶어놓았나 찾아보았더니 좋아하는 미래엔 출판사의 성인 단행본 브랜드 중 하나였다. 미래 엔에는 와이즈베리, 북폴리오, 현대문학이 속해 있다. 소설을 잘 알지 못할 때는 양질의 인문 서적을 출간하는 와이즈베리를 좋아했지만, ‘서독 이모’를 알게 된 이상 현대문학의 핀 시리즈에 관심 갖고 챙겨보려 한다. 다음 책은 017 이승우의 캉탕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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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고 또 읽기/인문2020. 1. 20. 23:57

[2020-02 / 인문 에세이]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 강상중. 노수경 옮김. 사계절. (2017)


일에 치이던 지난 연말 ‘왜 나는 매일 일하고 있는데 매일 일에 쫓기는가’에 대한 고민이 가득할 때 이 책이 눈에 띄었다. 저자 ‘강상중’은 재일 한국인 2세대로 재일 한국인 최초로 도쿄대학 정교수가 되었고, 현재 구마모토 현립극장 관장 겸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자의 이름이 낯익다고 생각했는데 몇 년 전 나쓰메 소세키를 소개하는 책에서 만난 적이 있는 작가였다. 자기 계발서 같은 뻔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고전, 인문과 역사 속에서 일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보라는 조언이 좋았다. 목차부터 깔끔하게 정리되어 책의 내용이 한눈에 들어오는 점도 좋았다. 비슷한 느낌의 책으로 사이토 다카시의 3으로 생각하라, 혼자 있는 시간의 힘, 유연한 지성의 단련법 등이 오버랩되었다. 일본인 특유의 분위기일 수도, 교육을 가르치는 교수님의 깊이일 수도.


바쁨과 아픔에 쫓겨 나를 잃어버렸다가 다시 정신 차리기 위해 이 책을 찾아갔다. 하지만 금세 또 일을 만들어 분주해져 버렸고, 지난 연말 동안 느꼈던 절실함은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도 이 책은 좋은 책이 분명하다. 생계유지만을 위해 주어진 업무를 적당히 때우는 식의 일을 원한다면 이 책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삶의 의미나 살아가는 이유, 일의 본질 같은 것을 고민해본 적이 있다면 꼭 한 번쯤 읽어볼 가치가 있다. 이상을 좇으며 일할 수 있는 나의 삶, 선택과 책임 같은 것을 나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내 인생에 감사한 마음이 들게 만드는 책이었다.


중압감에 짓눌리지 않기 위한 처방전 : 하나의 영역에 자신을 100% 맡기지 않겠다는 태도. 일에 임하는 자세도 그렇고, 삶의 방식도 그렇습니다. 하나의 일에 전부를 쏟아붓지 않는 것, 스스로를 궁지로 내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47)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에서 창조성이 생겨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할 사람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있는 그대로의 타자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을 다시 있는 그대로의 타자에게서 인정받아야 합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 성립되는 사회는 본래 그러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상호 자유롭게 개방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위축되었던 창조성의 문 또한 열릴 것입니다. (63)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중 : “그대에게 해로운 사람이 품은 생각과 그 사람이 그대에게 품게 하려고 하는 생각을 품지 말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물을 보라”(4장 2절) (197)


‘자연스럽게’ 사는 삶이란 내게 맞는 일이 과연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에 따라 목표를 세우고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삶입니다. 일을 통해 사회라는 공공의 장으로 ‘들어가라’고 권한다. ‘나가라’가 아니라 ‘들어가라’라는 표현을 통해 저자는 공적 영역의 ‘시코토’ 밖에 훨씬 더 넓고 다양한 가능성을 품은 일과 삶의 영역이 펼쳐져 있음을 시사한다. 폭넓게 배우고 더 큰 기회를 얻기 위해 먼저 사회로 들어가라고,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나’를 새롭게 발견하라고 말한다. (228)


-로빈슨 크루소 -나스메 소세키 ‘산시로’ -피터 드러커 매니지먼트-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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