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 읽고 또 읽기/문학2020. 4. 20. 19:00

[2020-16/소설, 영국 문학] 리어왕. 윌리엄 셰익스피어. 한우리 옮김. 더 클래식. (2020)

책 읽기를 즐기지만, 문학 작품 읽기는 부담스럽다. 특히 ‘세계 문학 컬렉션’ 같은 건 더욱더 어렵다. 독서 모임을 통해 고전 읽기를 도전했다가 포기했던 적이 있다. ‘데미안’과 ‘1984’인데 몇 페이지 못 보고 책장을 덮은 경험 덕분에 고전 문학을 대할 때면 두려움이 앞서는 편이다.

그 후로 몇 권을 다소 힘겹지 않게 완독 했고,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며 고전문학에 대한 약간의 흥미를 느낄 수 있었다. 안나 카레니나는 총 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어쩌다 보니 여러 출판사로 읽게 되었다. 그중 ‘더 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책의 두께나 크기, 글씨체와 종이의 느낌, 특히 번역체가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것들에 비해 편안하게 느껴졌다.

더 클래식 출판사에 대한 약간의 호감으로 리어왕에 도전했다. 리어왕은 더 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25번으로 올해의 신간(?)은 아니다. 2020년 3월에 개정판 1쇄를 찍으며 1608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 디자인과 같은 양장본으로도 함께 출간하였다. 더 클래식 출판사의 개정판 ‘리어왕’이 컬렉션과 양장본, 총 두 가지의 표지 디자인으로 출간된 셈이다. 책 소장을 즐기는 사람들의 구미를 당길만한, 아니 책 읽기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도 인테리어용(?)으로 솔깃할 만한 예쁜 책 한 권이 나타났다.

영국인이라면 누구나 읽는다는 그 셰익스피어의 책을 나는 단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다. 그나마 20여 년 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등장하는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을 본 게 전부이다. 그 영화 속에서 배우들이 ‘왜 저렇게 어색하고 불편한 말투로 연기를 하는가.’ 궁금했는데 책을 읽으며 궁금증이 풀렸다. 그건 셰익스피어 소설 속의 말투였다. 1600년대 소설의 특징일지도 모르겠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가장 숭고한 작품이라는 ‘리어왕’은 작가나 제목의 유명세로 첫인상은 다소 부담스러웠지만, 내용은 생각만큼 어렵지 않았고, 쉽고 재미있었다. 죽음, 변절, 배신과 신념, 의지 등 요즘 세상 사람들에게 흥미를 끌 만한 소재나 주제가 아니었지만, 이해하기 부담스럽지 않은 줄거리와 풍자와 비판을 담긴 글을 읽으며 과연 ‘권장 도서’라 부를 만 하구나 싶었다.

언젠가부터 외국 소설을 읽을 때면 관계도를 그리곤 한다. 헷갈리는 사람들의 이름만 정리되어도 훨씬 이해가 쉽기 때문이다. ‘리어왕’은 처음부터 연극 무대용으로 쓰인 글인지는 몰라도 등장인물이 많지 않고, 인물의 성격도 파악하기 쉽게 구성되어 있어 관계도 하나만 있어도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총 5막으로 구성되어 있고, 장마다 주제나 암시 등이 명확해서 나처럼 고전 초보자가 도전하기에 어렵지 않았다.


1600년대 시대적 배경을 알고 있다면 더 깊이 있게 즐길 수 있었겠지만, 배경지식이 없는 체 읽는 리어왕도 괜찮았다. 작품 해설에 나오는 ‘nothing can come of nothing.’ 문구가 마음에 남는다. 영어에 능숙하진 않지만, 원어로 읽고 이해하면 더욱 깊이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더 클래식 출판사는 영문판도 함께 제작하여 증정한다. 언젠가 영문판도 술술 읽어보고 싶다.


잘 들어봐요, 아저씨.
가진 것을 다 보여 주지 말고
아는 것을 다 말하지 말고
가진 것을 다 빌려 주지 말고
걷는 것보다는 말을 타며
듣는 말은 다 믿지 말고
내기에는 다 걸지 말며
술과 계집은 뒤로하고
집 안에만 머무르면
열의 두 곱인 스물이 넘는
이득을 볼 수 있을 거야. (41)

Posted by 따듯한 꽃.개

댓글을 달아 주세요

- 읽고 또 읽기/문학2020. 3. 30. 23:59

[2020-13] 삼국지 첩보전 2.안개에 잠긴 형주. 허무 지음. 홍민경 옮김. 살림출판사. (2020)

삼국지 첩보전은 총 4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삼국지를 기반으로 한 역사 추리소설이다. 그중 2권 ‘안개에 잠긴 형주’는 형주성에서 벌어졌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삼국지 첩보전’ 속 비밀 조직인 위나라의 진주조, 촉나라의 군의사, 오나라의 해번영을 중심으로 주인공 가일과 주변 인물인 우청, 손몽, 부진 그리고 가장 비밀스러운 인물 한선은 삼국지에서는 볼 수 없는 인물들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가공된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와 진짜 삼국지의 이야기, 유비의 명을 받들어 형주를 지키던 관우가 여몽에게 죽음을 당하기까지의 이야기가 절묘하게 섞여 있어 삼국지 원작에 대한 이해가 적은 내가 읽어내기에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가 거짓, 아니 허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만큼 실감 나는 상황 묘사와 흡입력 덕분에 숨을 죽이고 다음 장을 넘길 수 있었다.

위, 촉, 오나라의 경계의 중심지이던 ‘형주’는 2020년을 사는 우리에게는 코로나19의 발원지로 더욱 유명한 우한 지역의 옛 지명이기도 하다. 중국 역사에서 의미가 있는 지역이 코로나로 오명을 쓰게 되었으니 아쉽고 안타까울 뿐이다.

일개 역사 추리소설 속 등장인물도 서로를 속고 속이고 눈치싸움(?)이 빈번하게 만들어내고 있는데, 코로나19 이후로 보여지는 혼란스러운 국내 정치 상황에 빗대어 볼 때 단순히 눈에 보이는 상황만으로 전체를 판단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국지 첩보전을 읽으면서 책 속 등장인물처럼 명석하지 못한 보통 사람에 불과한 내가 알 수 없는 새로운 세상이 존재할 것만 같다. 해리포터와 나니아 연대기 같은 판타지 소설을 읽은 기분이 든다.

하나라도 놓치면 흐름을 잃게 되는 많은 이야기와 4권이라는 부담감 덕분에 빠르게 읽을 수는 없었지만 다음 장이 궁금하고 다음 권이 궁금한 시리즈물이었다. 삼국지를 좋아하고 추리소설을 좋아한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의 만물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습니다. 무엇도 영원한 것은 없지요. 예전에 누구의 것이었든, 그런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세상도 변하고, 그의 것이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게 됩니다. 장군은 왜 집착을 내려놓지 못하십니까? 장군이 그것을 내려놓는 순간 몸과 마음이 편안해질 겁니다. (118)

Posted by 따듯한 꽃.개

댓글을 달아 주세요

- 읽고 또 읽기/문학2020. 3. 29. 20:10

[2020-11] 삼국지 첩보전 1.정군산 암투. 허무 지음. 홍민경 옮김. 살림출판사. (2020)

초등학생 시절 5권짜리 만화책 삼국지를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다. 유비와 관우, 장비, 제갈공명, 조조 등 위, 촉, 오나라의 삼국통일 이야기에 빠져 몇 번이고 다시 읽던 기억이 난다. 성인이 될 때까지 삼국지를 또 읽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몇 년 전 경영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조조를 담은 책, ‘조조에게 배우는 경영의 기술(시그마 북스, 2016)’을 보면서 기억이 전부 옳은 건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내 기억 속 조조는 나쁜 놈이었는데 다른 시점으로 바라보니 다른 이야기가 보였다.

‘삼국지 첩보전’은 총 4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저자 허무는 중국의 미스터리 작가로 주목받았고, 오랫동안 ‘삼국지연의’를 고증하여 이 소설을 만들어냈다. ‘삼국지연의’가 양지의 이야기라면 ‘삼국지 첩보전’은 음지의 이야기이다. 1권은 정군산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군산 전투’는 219년 유비가 한중을 차지하기 위해 하후연이 지키던 정군산을 공격한 전투이며, 촉이 승리하고 유비가 촉의 첫 황제가 된 결정적 역할을 한 전투이다. 위, 촉, 오 삼국에는 자국의 비밀병기처럼 운영하는 진주조(위), 군의사(촉), 해번영(오)이 있다. 이 첩보 기관 사이의 은밀한 정보 전쟁이 정군산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베일 속 첩자로 등장하는 ‘한선’이라는 인물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신이 살펴보니 ‘춘추’에서 전대에 이미 일어난 일들을 돌아보고 하늘과 인간 세상의 관계를 깊이 있게 분석한 결과가 꽤나 놀라웠습니다. 한 나라가 도에 어긋나는 일을 하려 하면 하늘이 먼저 재해를 내려 그것을 경고하고, 그럼에도 반성하는 빛을 보이지 않으면 기괴한 일을 내려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그럼에도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재앙과 멸망이 닥치게 될 것입니다. (52)


코로나19 바이러스 전쟁(!) 시국에 ‘정군산 암투’ 책을 읽으려니 이상하게 감정 이입이 잘 되면서 200년대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음모가 가득한 세상, 잔인한 전투 묘사가 썩 유쾌하진 않았다. 그때는 시민의 인권 보장 같은 것도 없고, 정보공유도 어려웠겠지. 국가의 지도자나, 장군, 귀족 급이 아니어도 소소한 누림을 누릴 수 있는 2020년에 살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이런 소설 따위에 감정 이입해서 현재에 감사하는 작고 작은 내가 보였다.


모든 인간사는 하늘의 뜻에 달려 있으니 사람으로서 할 일을 다 했다면 그저 겸손하게 그 뜻을 기다려야 한다. (59)

Posted by 따듯한 꽃.개

댓글을 달아 주세요

- 읽고 또 읽기/문학2020. 3. 18. 15:00

[2020-09/소설, 독일문학] 개가 인간과 통하는데 꼭 필요한 대화 사전. 오셀로. 이형진 그림. 선우미정 옮김. 율리 체 받아 적음. 들녘. (2008)

 

2020년 초, 율리 체의 '새해'를 읽고 작가의 전작을 살펴보고 싶다는 호기심으로 도전한 책인데 저자명에 '오셀로'라고 쓰여있다. 율리 체와 오셀로는 어떤 관계지?

 

이 글을 쓴 오셀로는 여류작가의 개다. 작가를 주인으로 둔 덕에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마침내 견공들이 인간의 언어를 정확히 이해하면 할수록 오해의 소지가 줄어들며, 견공과 호모사피엔스의 공생도 훨씬 수월해지고 행복해질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오셀로는 '개가 인간과 통하는 데 꼭 필요한 대화 사전'을 통해 견공의 시각에서 본 인간의 세계를 유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율리 체 받아 적음.

 

 

이 책은 소설가 율리 체의 독특한 발상과 시선이 담긴 '반려견 생활 탐구 백과사전'이다. '오셀로'라는 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사를 ㄱ부터 ㅎ까지 사전의 형식으로 설명한다. 그림작가 이형진의 자유로운 그림체와 찰떡궁합을 이루고 있다.

저자는 오셀로의 마음속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는 듯 개의 시선으로 본 인간 세상을 위트 있게 표현한다. 한국에서만 살아본, 한국인의 정서로 읽다 보니 공감할 수 없는 유럽? 독일식 유머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이건 그저 허구일 뿐. 부담 갖지 않고 그저 소설처럼 느끼는 대로 읽으면 된다.

반려견과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시라. 율리 체라는 작가에게 매력을 느낄 것이다. 난해한 편집 덕분에 가독성이 좋지 않지만 이 차도 저자 오셀로의 의도일 수 있으니 받아들이자.



Posted by 따듯한 꽃.개

댓글을 달아 주세요

- 읽고 또 읽기/문학2020. 2. 28. 23:34

[2020-08 / 소설] 새해. 율리 체. 이기숙 옮김. 그러나 출판사. (2019)


슈피겔 종합 1위, 16개월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소설, ‘새해’
휴양지의 호텔 같은 예쁜 일러스트를 표지에 이끌려 읽게 된 ‘새해’는 독일 작가 율리 체의 2019년 신간이다. 율리 체(1974~)는 독일의 본에서 태어나 파사우와 라이프치히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미국의 뉴욕과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 장기간 체류하며 데뷔작 ‘독수리와 천사’(2001)가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기타 소설들도 35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다. 2002년 라우리스 문학상부터 여러 차례 문학상을 받은 작가이다. (책날개 참고)

법학을 전공하고 유럽법과 국제법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 쓴 소설이라니. 연결고리가 독특하다고 생각하며 책장을 넘겼다. 깔끔한 표지와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과 내용 구성 등에서 자신감이 느껴졌는데, 역시나였다.

주인공 헤닝이 자전거를 타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자전거로 언덕길을 올라가는 한 사람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질 만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보통 글에서 생각을 담을 때 ‘작은따옴표’를 사용하고, 대화를 담을 때 “큰따옴표”를 사용하곤 하는데 그런 구분 없이 사실 묘사와 주인공의 생각을 넘나들며 왔다 갔다 한다. 그 부분이 어렵거나 헷갈린다기보다는 좀 어지러웠다. 마치 힘든 자전거로 오르막길을 올라갈 때 숨이 차고 머리가 띵해지는 그런 기분. 아마도 ‘그것’의 정체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나 싶다.

소설의 초반부에 시점의 이동인지, 상상인지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하느라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했다면 중반부 이후부터는 순식간이다. ‘그것’의 실마리를 찾아내고, 결말까지 너무 빠르게 훅 지나와버린 기분이다. 자신의 글에 확신을 가진 작가의 자신감이 느껴졌다. 공포나 호러 소설은 아니지만, 더한 고통스러움이 있다. 주인공 헤닝과 같은 경험을 해본 적이 없지만, 누구든 그런 상황을 직면하게 된다면 누구든 갖게 될 공포. 그래서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

어린 시절의 아픈 경험이 한 사람에게 얼마나 강한 트라우마로 남게 되는지, 그것을 극복하기까지 얼마나 큰 노력이 필요한지가 담겨있어 책장을 덮은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그 여운이 남아있다. 이해하기 어렵지 않으면서 괜찮은 소설 한 권을 읽었다.

Posted by 따듯한 꽃.개

댓글을 달아 주세요

- 읽고 또 읽기/문학2020. 1. 27. 16:42

[2020-04 / 문학, 한국소설] 사랑의 생애. 이승우. 예담. (2017)

사랑은 모든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게 하는 근거이다. 사랑의 근거이고 사랑의 깊이이고 사랑 자체이다. 세상의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근거이고 깊이이며 사랑 자체인 사랑 없이는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을 품고 있다.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 안에 포섭되어 있다. 사랑 자체인 이 사랑이 두 사람 사이로 들어와 자기 생애를 시작한다. 그 생애가 연애의 기간이다. 어떤 생에는 짧고 어떤 생애는 길다. 어떤 생애는 죽음 후에 부활하고, 어떤 생애는 영원하다. (167)


2019서울 국제 도서전 기념품(?)이었던 '맛의 기억(다양한 분야의 작가들이 맛에 대한 이야기를 엮은 소책자)'을 통해 이승우라는 소설가를 알게 되었다. 언어를 가지고 노는(!) 저자 특유의 필력에 반해 이승우의 여러 책을 담아왔고, 그중 첫 번째로 완독한 책이다. 작가는 저자의 말을 통해 '떠오르는 대로 순간의 단상들을 적어둔 여러 개의 메모들을 여러 권의 몰스킨 수첩을 거쳐 스마트폰의 메모장으로 옮겨 왔다가 책으로 만들었다.'라고 소개한다. 저마다 다르지만 비슷하고 비슷하면서도 다른, 사랑이라는 경험의 신비를 담은 책이다.


'사랑의 생애'는 등장인물 형배, 선희, 영석, 그리고 준호의 사랑 이야기가 우연하게 얽혀있다. 각자 자신만의 어쩔 수 없는, 치열하고 못나빠진 날것의 사랑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만, 저마다의 사정에 공감되는 것은 작가 이승우의 솜씨 덕분일 것이다. 글을 읽는 내내 때로는 형배에게, 때로는 선희에게, 영석, 그리고 준호에게 감정이입하여 내가 그 사람인 듯 몰입하여 읽을 수 있었다. 한 사람의 감성, 심리 묘사가 너무나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어 한때 즐겨 읽던 알랭 드 보통이나 김형경의 소설을 떠오르게 한다. 내 감정을 들킨 것만 같은 이런 묘사는 마음이 바쁠 때에는 잘 읽히지 않다가 여유가 있고, 한가한 시기에 후루룩 읽게 된다.

어떤 방식이 더 좋거나 괜찮다고 말할 수 없는 각자 사랑에 대한 경험, 사랑의 생애는 작가의 말마따나 사랑 그 한가운데 빠져 있는 자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다. '진정으로 살지 않는 자가 삶이 무엇인지 묻는다.'라는 글귀가 마음에 남는다. 책을 읽으며 사랑이 하고 싶어졌고, 삶이 궁금해졌다.

분명하고 알아듣기 쉽게 고백하기가 쉽지 않다. 사랑하는 자의 말은 불가피하게 우회하는 말이다. 사랑의 말은 직선을 모른다. 아니, 모르지는 않지만 쓰지 못한다. 쓰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두근거림과 조심스러움, 즉 수줍음이 쓰지 못하게 한다. 직선의 언어는 빠르지만 날카로워서 발화자든 청자든 누군가를 다치게 하기 쉽다. 자기든 남이든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이 시작되는 현장에서 직선의 언어는 여간해서는 채택되지 않는다. (48)

가치를 부여하는 일은 사람마다 다르다. 이 사람이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라고 저 사람도 반드시 그래야 하는 법은 없다. 이 사람에게 대단한 일이 저 사람에게는 대단하지 않거나, 저 사람에게 하찮은 일이 이 사람에게는 엄청나게 중요한 일인 경우는 허다하다. 기쁨과 보람을 느끼며 하는 일에 우리는 가치를 부여한다. (...) 우리는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하는 대단한 일을 하며 살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 순간을 기다리면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일을 견딘다. 그 대단한 일을 하기 위해, 혹은 그 일을 하기를 갈망하며 이 대단하지 않은 일을 한다. 이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 건 그 일 때문이다. 그 일에 대한 기대가 이 일을 감당하게 한다. (53)

Posted by 따듯한 꽃.개

댓글을 달아 주세요

- 읽고 또 읽기/문학2020. 1. 21. 01:34

[2020-03 / 문학, 한국소설] 서독 이모. 박민정. 현대문학. (2020)


요즘은 수많은 근심 걱정으로 책 읽기가 쉽지 않은데, 서독 이모는 예외였다. 큰 기대 없이 책장을 넘겼다가 앉은자리에서 단숨에 끝까지 읽어버렸다. 흡입력이 좋고 재미있으면서 명쾌(!)하지만, 마냥 가볍기만 한 것도 아니라 곱씹을 거리도 있다. 서독 이모는 1985년생 작가 박민정의 소설이다. 소설에 있어 나이라는 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기준이 되어버리니 ‘나보다 어린 작가’가 되었다. 어리면서 잘 나가는 대부분 사람들의 소설은 전개가 빠르거나 소재가 자극적이어서 불편한 경험이 많았다. 도도하고 거친 느낌이 싫어서 웬만하면 피하는 편이다. 하지만 박민정의 소설은 그런 나의 선입견을 깨트렸다.


소설 속 주인공 정우정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대학원을 졸업하기 위해 구질구질한 대학원 생활을 버티며 논문과 소설을 쓴다.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소재를 찾다가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인 이모와 이모부 이야기를 선택했고,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허구인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쓴 글과 석사 논문 통과 과정인 자신의 이야기가 소설이 되었다. 흥미롭다. (이런 과정을 책 뒤편에 드라마투르기라고 표현한다.)


드라마투르기는 작품에 대한 여러 해석 중 하나의 관점을 채택하여 작품에 의미를 구체화하는 비평적 활동이다. 즉, 하나의 스토리에 대한 비평적 시선 및 연출을 위한 이론적 실천이다. (106)


너에게는 이모의 불행이 심심풀이 땅콩이니, 나는 엄마의 말을 떠올렸다. 두 번째 단락을 넘어서고 나서도 꽤 많은 분량을 단숨에 써버렸지만 더는 이 이야기를 이어 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82)


나의 쓰기도 떠올랐다. 고작 나의 경험과 내 주변 이야기를 쓰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미천한 글짓기가 부끄러웠지만, 정우정, 아니 박민정 작가처럼 나도 할 수 있다면 계속 쓰면 작가가 될 수 있으려나?!


소설 속 작가는 본인의 가족사, 서독과 동독의 통일에 엮인 비극, 정체성과 삶, 씀이라는 행위 등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결코 무겁지만 한 건 아니다. 이 소설에 재미가 더해지는 것은 통일 전후 독일과 현재 한국의 상황이 오버랩되는 점이다. 정우정이 박민정은 아닌지, 이 소설 자체가 진실인지 허구인지 궁금증을 갖고 ‘서독 이모’를 읽으며 최근 재미있게 보는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떠올랐다. 현실에서 일어날 것 같지 않은 통일 같은 소재를 독일 이모와 그녀의 남편 클라우드의 이야기를 통해 불쑥 차용한다는 점에서 더욱 드라마처럼 느껴졌다. 소설 속 이야기들이 너무나 거짓말 같은데 그래서 더욱 진짜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이렇게 덜컥 통일이 이루어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책날개 참고)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 선은 현재 021권까지 발행되었고, 30권까지 예정되어 있다. 어떤 출판사에서 이렇게 앙큼(!) 발랄한 책을 시리즈로 묶어놓았나 찾아보았더니 좋아하는 미래엔 출판사의 성인 단행본 브랜드 중 하나였다. 미래 엔에는 와이즈베리, 북폴리오, 현대문학이 속해 있다. 소설을 잘 알지 못할 때는 양질의 인문 서적을 출간하는 와이즈베리를 좋아했지만, ‘서독 이모’를 알게 된 이상 현대문학의 핀 시리즈에 관심 갖고 챙겨보려 한다. 다음 책은 017 이승우의 캉탕을 읽어야겠다.

Posted by 따듯한 꽃.개

댓글을 달아 주세요

- 읽고 또 읽기/문학2019. 12. 30. 23:19

[2019-77 / 기타] 맛의 기억. 권여선 외. 대한출판문화협회.(2019)



어릴 적 엄마가 해주신 음식 중 가장 기억나는 건 정어리 찌개이다. 맛이 좋고 나쁨을 떠나서 꽤 자주 먹었던 기억이 난다. 정어리 통조림을 꽁치찌개처럼 끓인 정어리 찌개는 통조림 생선 특유의 식감, 생선 가시를 혀로 살살 녹이는 맛이 좋았다. 그 시절 우리 집 식단은 맞벌이 부모가 손쉽게 끼니를 때울 수 있는 김치찌개, 카레, 곰탕 등이 전부였다. 손이 많이 가는 김밥 같은 건 언감생심. 김밥보다 손쉬운 유부초밥도 먹어본 적이 없다. 그저 엄마가 익숙하고 빠르게 준비할 수 있는 것들을 먹곤 했다.


엄마의 퇴근이 늦은 날엔 가까운 곳에 사는 이모 댁에 일부러 찾아가 저녁을 먹었다. 이모 댁에서 먹는 밥은 늘 맛이 좋았다. 정말, 밥부터 맛이 달랐다. 뛰어난 음식 솜씨 따위 필요치 않은 그저 밥에 불과한데도, 우리 집에서 매일 먹던 그것과 차이가 커서 이모네에서 식사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너무 오래 끓여 배춧잎이 흐물거리는 우리 집 김치찌개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맛. 이모네에서 먹던 음식이 특별한 요리는 아니었다. 흔히 말하는 집밥, 그 정도다. 갓 지은 따끈한 밥과 엿기름이 섞여 달곰하고 고소한, 깔끔하게 똥을 발라낸 매콤한 멸치볶음, 퍽퍽한 목살 같은 돼지고기와 감자 등을 넣고 은근하게 끓여낸 고추장찌개, 갓 구워낸 고등어나 꽁치구이, 슴슴하고 부들부들한 무나물, 김과 김치. 밥과 찌개에 3~4개 정도의 정갈한 반찬, 그리고 식탁 앞에서 내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나를 지켜봐 주셨던 이모. 그 시절 그 순간에는 맛있는 음식과 이모가 있었다. 이모는 늘 내가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보셨다. 그러면서 사는 이야기나 동네 사람들 이야길 하셨다. 501호 누구는 어쩌고, 이모 동창 누구 딸이 어쩌고.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도 않고 기억할 수도 없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다 보면 이내 머리가 아파져 왔다. 가끔은 그런 행위들이 이모께서 차려주신 밥을 먹고 지불해야 하는 비용처럼 느껴져 습관적 맞장구가 피곤할 때도 있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엄마밥보다 이모밥이 그립다.


C와 함께할 땐 거의 맛집을 찾아다녔다. 내가 찾았다기보다는 그쪽에서 늘 데이트 코스를 준비해왔다. 스파게티나 피자, 커피숍 등 ‘데이트’라고 불릴만한 메뉴가 대부분이었고 그와 함께 다녔던 곳은 다 맛이 좋았다. 그는 맛뿐 아니라 멋에도 관심이 있었다. 우리는 취향도 잘 맞았다. 음악회를 다녔고, 미술관을 다녔다. 그는 첫 연애였고 나도 그와 다를 바 없었다. 우리는 영혼의 단짝인 줄 알고 열렬하게 사랑했지만, 열정적으로 타오르던 불씨는 금세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C와 함께했던 맛집을 더는 찾아다니지 않는다.


B와 함께할 땐 늘 고기를 먹었다. 함께한 시간 동안 다른 메뉴를 먹은 기억이 거의 없다. 고기와 커피, 그게 전부다. 회, 주꾸미, 소고기, 삼겹살 등 다양한 고기류를 섭렵했고, 그중에 제일은 삼겹살이다. 삼겹살을 유난히도 부르짖던 그 사람, 우리의 마지막 식사도 삼겹살이었다.


N과 함께 식사를 ‘즐기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365일 언제나 다이어트를 하고 있었기에 어떤 음식이든 개미 눈곱만큼 먹었고, 배부르다며 절반 이상 남기곤 했다. 남겨진 음식이 보기 싫었던 나는 언제나 찬반 처리반이 되었다. N과 함께 식사하면 종종 배부른 불쾌감이 들곤 했다. 이럴 거면 차만 마시고 헤어질걸. 어떤 메뉴든 가리지 않고 먹질 않았기에 맛있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 같은 걸 느껴본 기억이 없다. SNS에 공유된 N의 데이트 사진에는 언제나 맛있게 먹었고, 배부르다는 글이 남겨있지만, 그가 정말 맛있게 배부르게 먹었을지, 뭔가 먹긴 하는 건지 늘 궁금하다.


사람과 맥주를 좋아하는 J 덕분에 수제 흑맥주의 맛을 알아버렸다. 이전에도 기네스나 코젤 다크 같은 진한 흑맥주를 좋아하는 나의 취향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J 덕분에 흑맥주의 스펙트럼이 넓어졌다. 스타우트에는 브라우니와 올리브가 참 잘 어울렸다. 속상할 때 꿀꺽꿀꺽 마시는 술 말고 기분 좋게 홀짝이는 맥주의 맛을 알게 되었다. J와 자주 만나지 않는 요즘은 맥주 따위와 멀어진 지 오래다.


K가 소개하는 곳은 전부 기념할만하다. 음식점이나 예쁜 공간, 전시회 등 영감을 받을만한 핫플레이스를 상당히 구체적으로 분류하여 정리하고 있고, 이따금씩 소개해준다. 가장 좋았던 곳은 이디야 커피랩이다. 보급형(?) 프랜차이즈 커피 본사가 뭐 얼마나 하겠나 싶은 마음으로 방문했지만, 그 후 다른 지인과 세 번을 더 방문했다. 맛과 멋 분위기 모두 굉장한 공간이었다. K가 소개하는 곳은 무조건 좋다. 공간이나 음식 맛이 주는 매력도 상당하지만, 사실 K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좋다.


평소 간단하게 때우는 식사를 하는 편이다. 어릴 적부터 길들여진 식습관 덕분에 삼시 세끼 같은 음식을 먹어도 상관이 없다. 한솥 가득 끓인 청국장에 밥 말아먹고, 두부나 고기류를 넣어 한 번 또 끓이고, 남은 국물에 라면을 넣어 또 먹는다. 내게 식사란 배고프지 않기 위해 먹는 것이지만, 사람이 더해지면 의미가 달라진다. 맛이 우선순위인 상대방과 함께라면 나도 맛 좋은 음식을 먹게 된다. 역시 내겐 맛보다는 ‘함께’가 먼저다. 좋은 것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 ‘너와 내가 함께한 시간이 만족스럽다.’가 ‘맛있다’로 기억된다. 이런 걸 푼크툼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2019 서울 국제도서전의 ‘리미티드 에디션’ 맛의 기억은 권여선, 김봉곤, 박찬일, 성석제, 안희연, 오은, 이승우, 이용재, 이해림, 정은지 이상 10명의 작가가 ‘맛’을 모티브로 쓴 글을 엮었다. 각양각색 작가들의 글을 읽다 보니 ‘나의 맛의 기억’도 기록하고 싶어 졌다. 그런 의미에서 참 재미있는 책이다. 그중 이승우라는 작가에게 관심이 갔고 조만간 이승우의 소설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Posted by 따듯한 꽃.개

댓글을 달아 주세요

- 읽고 또 읽기/문학2019. 12. 17. 13:31

[2019-72 / 고전] 좁은 문. 앙드레 지드. 조정훈 옮김. 더클래식. (2017)


은희경의 ‘빛의 과거(민음사, 2019)’에서 등장인물 이동휘가 주인공 김유경에게 했던 말 중에서 자신은 사실 ‘브론스키보단 제롬에 가까웠다’는 말에 꽂혀 제롬이 주인공인 소설을 검색하였고, ‘좁은 문’을 읽게 되었다. 브론스키가 화려하고 열정적인 사랑을 좇는 사람이라면 제롬은 지고지순하고 끈질긴 인물일까 싶은 단순하고 단편적인 생각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좁은 문은 가벼운 연애 소설이 결코 아니었다) 청소년 권장 도서라는데 어느 부분이 청소년이 꼭 읽고 이해하고 넘어갈 부분인지, 주의해서 알아채야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렵고 버거웠다. 재미있는 소설을 읽을 때 느낄 수 있었던 긴장감 같은 것은 하나 없고, 고구마처럼 답답해서 책장을 넘기기 어려웠다. 이것은 마치 얼마 전 읽었던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나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한 사람 특히 여성의 자유로운 연애 같은 건 보장되지 않은 100년 전의 생활 모습이 느껴졌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크고 넓은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나니 그리로 가는 자가 많음이라. 하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과 길은 좁으니 그것을 찾는 자가 적음이라. (25)


내가 행하는 모든 미덕이 모두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의 곁에 서면 나의 미덕이 파괴되는 느낌이 든다. (178)


2019년을 사는 나는 절대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150년 전의 삶. 불만에 가득 차 있는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요즘이지만, 이 역시 100년 전 어떤 여성도 누리지 못한 여유와 자유였으리라. 지금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어려운 책 한 권을 읽어냈다. 불과 100년 전 소설과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돌아보며 지금의 우리를 이해할 수 없는 100년 후 사람들의 모습이 문득 그려졌다. 100년 전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습들이 옳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어떤 기준으로 지금이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과연 잘 가고 있는 걸까.

Posted by 따듯한 꽃.개

댓글을 달아 주세요

- 읽고 또 읽기/문학2019. 11. 23. 21:34




[2019-68 / 한국소설] 빛의 과거. 은희경. 문학과 지성사. (2019)

어느 순간 나는 그녀에게서 나의 또 다른 생의 긴 알리바이를 보았던 것이다. (13)

혼자라는 건 어떤 공간을 혼자 차지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익명으로 존재하는 시간을 뜻하는 거였다. (84)

그동안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 가지 않고 모르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던 오현수는 모르는 것이 거의 다라는 생각을 하나 더 보태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다른 조건을 가진 삶에 대한 존중의 한 방식이었다. (264)

그녀는 깨어 있는 것과 행동하는 것 모두 중요하다고 말한 뒤 깨어난 사람은 누구나 행동해야 할 책임이 있으며 그 책임을 회피한다면 언제까지나 주인 된 세상에 살지 못하고 남의 세상에 억지로 적응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267)

우리가 아는 자신의 삶은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334)

어차피 우리는 같은 시간 안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었고 우리에게 유성우의 밤은 같은 풍경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책에서 말하듯 과거의 진실이 현재를 움직일 수도 있다. 과거의 내가 나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아니라면 현재의 나도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다. (335)

문학소녀(?) 가 되고 싶던 20대 후반에 열심히 챙겨보던 은희경 작가가 신간을 냈다. 마지막으로 본 게 ‘새의 선물’,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이니 꽤 오랜만이다. 한동안 소설 같은 걸 읽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사실 그런 건 나 하기 나름인데.. 사실 소설을 멀리했던 건 핑계다. 열심히 먹고사는 사람 코스프레가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무슨 바람이 불어 은희경 작가의 신작을 만났다. 인물 심리묘사가 가득한 여성여성한 감정을 건드리는 내 기억 속 은희경 그대로다. 기숙사 같은 건 살아본 적도 없고, 70년대에 대학을 다니지도 않았지만, 작품 속 등장인물이 된 듯 소설에 푹 빠져 읽었다. 은희경 작가의 실제 이야기인지 내 이야기인지 소설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푹 빠져들었다. 등장인물 이동휘의 마음이 궁금해서 ‘좁은 문’을 읽기 시작했다. 내 취향은 제롬보단 이동휘지만.

한없이 철없고 부족하고 어쩔 수 없이 맑은 청춘 나의 이십 대 초반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삶에 찌든 지금이 오버랩되었고. 건조한 가장의 무게만 가득한 내게도 여성스러운 감성이 아직 남아있다는 걸 되새기게 해준 ‘빛의 과거’, 참 좋았다. 역시 은희경. 대세 김금희보단 은희경의 연륜과 탄탄함이 좋다.

Posted by 따듯한 꽃.개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