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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고 또 읽기/인문

[책 추천] 백 년을 살아보니. 김형석.

[완독 44 / 인문학] 백 년을 살아보니. 김형석. 덴스토리.(2016)



1920년생, 일본 조치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30여 년간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후임을 길렀고 현재에도 활발한 저서 활동과 강의 활동을 펼치고 있는, 우리나라 철학계의 거두, 현 99세인 김형석 교수님의 책.

저자가 살아온 인생을 바탕으로 행복론, 결혼과 가정, 우정과 종교, 돈과 성공, 명예, 노년의 삶 총 5가지 영역으로 나누어 후세들에게 전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젊은 내가 아무리 파닥거려도 알 수 없는 어른의 눈으로 보이는 넓이. 철학 교수의 지혜가 담겨있지만 어렵지 않고 친할아버지의 편지를 엿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100년쯤 살다 보니 제자의 제자, 그 제자까지 보게 되고 자식의 손주 증손주까지 보며 제자 일생의 마감도 지켜보는 처지가 되어버린 저자는 최근 나를 감성에 빠져들게 했던 드라마 도깨비(2016)의 공유나, 흑기사(2017)의 김래원, 영화 아델라인(2015)의 아델라인 처럼 남들보다 오래 살아 해탈한(?) 인생을 보는 것 같았다. 당장 지금 눈앞에 있는 이익을 위해 씩씩거리며 살아온 나는 언젠가부터 인생이 허무했고 무의미하다는 생각 덕분에 많은 의욕을 잃어버렸다. 그러면서 건강도 정신도 흔들리게 되었다.

2018년 현재 99세를 살고 계신, 100세 어르신의 책을 읽으며 내일 당장 죽을 것처럼 사는 내가 보였다. 80세를 지나며 욕심을 내려두게 되었고, 90세를 지나며 많은 걸 잃어간다고 이야기하셨다. 그 절반도 살지 않은 내가 벌써 다 놓아버린 듯 삶을 대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방향은 비슷했지만, 초점이 틀렸다. 오늘만 살 것처럼 만족하고 행복하고 사랑해야 했는데 내일 당장 죽을 것처럼 욕심내지 않았다. 어차피 내일이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 것들, 애늙은이처럼 해탈한 듯 다 놓아야 한다는 듯, 그렇게 살 필요는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철학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지만 짧은 지식으로 많은 책을 접할 수 없었는데, 철학 교수의 인생이 녹아있는 한 권의 책 덕분에 하루하루 살아내기에 급급했던 내 삶의 이정표가 생긴 기분이다. 정신 놓치지 말고 삶의 영역으로 뛰어들어가 뭐든 치열하게 신나게 즐겨야겠다.




모든 남녀는 인생의 끝이 찾아오기 전에 후회 없는 삶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사랑이 있는 고생이다. 사랑이 없는 고생은 고통의 짐이지만, 사랑이 있는 고생은 행복을 안겨주는 것이 인생이다. (96)

인촌은 아첨하는 사람, 동료를 비방하는 사람, 편 가르기를 하는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번 당신 밑에서 일하도록 받아들인 사람은 끝까지 돌보아주는 후덕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점들을 배웠기 때문에 나도 그런 사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사회생활을 이어온 셈이다. (185)

건강은 일을 하기 위해서
나는 일이 내 건강을 유지해주었다고 믿고 있다. 지금도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고 있다. 일을 하기 위해서는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운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243)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
인간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고 성숙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보는 관념이 보편화되고 있다. 늙는다는 것은 꽃이 피었다가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익어가는 것 같은 과정이다. 그 기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지혜이다. 지혜를 갖춘 노년기와 지혜를 갖추지 못한, 흔히 말하는 어리석은 노년기의 차이는 너무나 뚜렷하다. (...) 원로가 있는 사회와 없는 사회는 다르다. 지혜로운 조부모나 부모가 있는 가정과 없는 가정이 다른 것과 비슷하다. (252)

오래 사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생각해보면 인간의 뜻과 운명은 누구도 모른다. 철없을 때 친구들은 추억마저도 사라지고 철들었을 때의 친구들은 헤어질 운명이었던 것 같다. 역사가 안겨준 짐이기도 했다. 그러나 말년에 우리들의 우정은 사회적 공감을 얻으면서 오래 남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들의 삶과 그 의미는 어떤 섭리에 따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28)


운명도 허무도 아닌
쇼펜하우어는 “젊었을 때는 모두가 자유를 외치다가도 늙으면 모든 것이 운명이었다고 인정하게 된다.”고 말한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운명론자가 된다는 뜻이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니체는 “잡스러운 범인들의 삶을 버리고 초인이 돼라.”고 외쳤다. 그러나 그 초인은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운명애의 철인이라고 말했다.
또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허무주의와 회의주의의 울타리를 넘어설 수가 없었다. 솔로몬은 지혜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인간 역사에 관해서는 허무주의자였다. 유신론적인 허무주의자라고 말해서 좋을지 모르겠다. 아마 우리 문화사에서 가장 훌륭한 지혜를 갖춘 사람은 독일의 괴테였을 것 같다. 역사상 가장 아이큐가 높은 사람은 괴테라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러나 괴테는 ‘파우스트’의 주인공과 같이 회의주의자였다. 회의주의자의 결론은 허무주의로 귀착된다.
그 둘, 즉 운명과 허무가 전부라면 인간과 삶의 의미는 어떻게 되는가. 그렇다면 제3의 삶의 길은 없는가라고 묻고 싶었다. 그런데 구약과 신약의 역사를 보면 운명론도 허무주의도 아니다. 또 다른 차원의 인생관이 있다. 그것이 섭리의 길이다. 섭리를 거부할 수도 있고, 섭리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도 할 수 있다. (...) 섭리의 주관자는 자연과 인간을 떠난 제3의 실재이다. 구약과 신약은 그 인격적 타자를 신이라고 불렀고 또 유일신으로 믿고 살았다. 종교적 신앙을 가진 사람은 ‘나와 신’, 세계 역사와 신의 관계를 떠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관계를 섭리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의 삶 속에서 그 섭리에 해당하는 체험을 쌓아온 것이다. (145-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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