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독 30 / 인문학] 문장의 온도. 이덕무. 한정주 옮김. 다산초당.
이덕무는 북학파 실학자이자 영정조 시대에 활약한 조선 최고의 에세이스트이자 독서가이다. 가난한 서얼 출신으로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으나 자신의 힘으로 학문을 갈고닦았다. 당대 최고 지성인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유득공과 교류하면서 ‘위대한 백 년’이라 불리는 18세기 조선의 문예 부흥을 주도했다. 1792년 개성적인 문체 유행을 금지하는 문체반정에 휘말렸음에도 사후 국가적 차원에서 유고집 ‘아정유고’가 간행될 만큼 대문장가로 인정받았다. (책 소개 참고)
조선 시대 역사와 고전을 연구하고 있는 한정주는 자칭 ‘이덕무 마니아’를 자처하며, ‘조선 최고의 문장 이덕무를 읽다.’ (다산초당, 2016)를 출간한 바 있으며 이번에 이덕무의 소품문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를 정리한 ‘문장의 온도’를 출간했다.
역사와 문화, 우리 문학에 관한 관심이 이어져 이 책을 읽게 되었다. 학창시절 시험을 위해 외웠던 단편적 지식 말고 내 의지로 고전문학을 읽는 건 도덕경, 논어 다음으로 처음이다.
베스트셀러로 크게 인기 있는 어떤 책과 제목이 닮았다. 함축적이고 간결한 제목 덕분에 바이럴 마케팅 일부인가 싶었지만, 일상 속 한순간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짧은 글로 기록하는 이덕무의 한시를 읽고 나니 오늘날 유행하는 에세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 훨씬 깊이 있었다. 1,000년이나 시대를 앞서갔던 에세이스트 이덕무.
저자 한정주는 이덕무의 문장이 동시대 다른 선비들의 그것과 조금 다르다고 한다. 아마도 본인이 처한 환경 덕분이 아닐까? 문장에 뛰어났지만, 양반이 아니니까 틀에 박힌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었고 자신의 관심사를 파고들어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단숨에 읽기보다 시를 즐기듯 한편씩 곱씹으며 오랫동안 곁에 두고 조금씩 읽기 좋았다. 한자를 잘 알았더라면 한시를 직접 읽으며 이덕무가 의도한 음률 같은 것도 즐길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 번역가 한정주 님의 글로 대신할 수 있었다.
고단한 삶을 살아내느라 힘든 순간에도 늘 책을 놓지 않았던 부모님 덕분에 나도 책벌레가 되었다. 양질의 책을 읽거나, 자주 읽는 것으로 중요하겠지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길 때 책으로 해결한다. 책에서 얻는 지혜는 수많은 성인이 내게 가르침을 주는 거라 전부를 흡수할 수는 없지만, 책을 읽으며 생각을 곱씹는 행동은 알 수 없는 후련함을 가져다준다. 내게 책은 그런 존재다.
이덕무의 책도 법정 스님의 책처럼 오랫동안 내게 울림을 줄 것 같다.
겸재 정선이 진경 산수화의 대가였다면, 진경 시문의 대가는 이덕무였다. 그는 그림과 시문을 같은 뿌리에서 나온 다른 가지로 보았다. (...) 글을 읽을 때 그림이 그려지면, 그 글은 진실로 좋은 글이다. (...) 마찬가지로 그림을 볼 때 글이 떠오르면, 그 그림은 참 훌륭한 그림이다. 이러한 까닭에 옛 그림에는 반드시 화제나 발문이 있었다. 글을 쓰듯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그리듯 글을 써야 할 까닥이 바로 여기에 있다. (16)
돈오점수와 돈오돈수라는 말이 있다. 돈오점수는 단박에 깨치고 점진적으로 닦는다는 말이다. 깨달음을 얻은 다음에도 계속해서 수행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돈오돈수는 단박에 깨달음을 얻고 단박에 닦는다는 뜻이다. 단박에 깨달음을 얻어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는 경지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전자가 깨달음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계속해서 수행을 해야 한다는 말이라면, 후자는 한 번의 깨달음만으로도 수행이 완성된다는 말이다. (69)
이덕무는 박물학자, 박지원은 문학가, 홍대용은 천문학자, 박제가는 사회개혁가, 유득공은 역사학자, 정철조는 돌과 조각칼을 잘 다루는 공장, 유금은 기하학자였다. (91)
복숭아꽃 붉은 물결
삼월 푸른 계곡에 비가 개고 햇빛은 따사롭게 비춰 복숭아꽃 붉은 물결이 언덕에 넘쳐 출렁인다. 오색빛 작은 붕어가 지느러미를 재빨리 놀리지 못한 채 마름 사이를 헤엄치다가 더러 거꾸로 섰다가 더러 옆으로 눕기도 한다. 물 밖으로 주둥아리를 내밀며 아가미를 벌름벌름하니 참으로 진기한 풍경이다. 따사로운 모래는 맑고 깨끗해 온갖 물새 떼가 서로서로 짝을 지어서 금석에 앉고, 꽃나무에서 지저귀고, 날개를 문지르고, 모래를 끼얹고, 자신의 그림자를 물에 비추어 본다. 스스로 자연의 모습으로 온화함을 즐기니 태평세월이 따로 없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웃음 속에 감춘 칼과 마음속에 품은 화살과 가슴속에 가득 찬 가시가 한순간에 사라짐을 느낀다. 항상 나의 뜻을 삼월의 복숭아꽃 물결처럼 하면 물고기의 활력과 새들의 자연스러움이 모나지 않은 온화한 마음을 갖도록 도와줄 것이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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