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77 / 기타] 맛의 기억. 권여선 외. 대한출판문화협회.(2019)
어릴 적 엄마가 해주신 음식 중 가장 기억나는 건 정어리 찌개이다. 맛이 좋고 나쁨을 떠나서 꽤 자주 먹었던 기억이 난다. 정어리 통조림을 꽁치찌개처럼 끓인 정어리 찌개는 통조림 생선 특유의 식감, 생선 가시를 혀로 살살 녹이는 맛이 좋았다. 그 시절 우리 집 식단은 맞벌이 부모가 손쉽게 끼니를 때울 수 있는 김치찌개, 카레, 곰탕 등이 전부였다. 손이 많이 가는 김밥 같은 건 언감생심. 김밥보다 손쉬운 유부초밥도 먹어본 적이 없다. 그저 엄마가 익숙하고 빠르게 준비할 수 있는 것들을 먹곤 했다.
엄마의 퇴근이 늦은 날엔 가까운 곳에 사는 이모 댁에 일부러 찾아가 저녁을 먹었다. 이모 댁에서 먹는 밥은 늘 맛이 좋았다. 정말, 밥부터 맛이 달랐다. 뛰어난 음식 솜씨 따위 필요치 않은 그저 밥에 불과한데도, 우리 집에서 매일 먹던 그것과 차이가 커서 이모네에서 식사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너무 오래 끓여 배춧잎이 흐물거리는 우리 집 김치찌개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맛. 이모네에서 먹던 음식이 특별한 요리는 아니었다. 흔히 말하는 집밥, 그 정도다. 갓 지은 따끈한 밥과 엿기름이 섞여 달곰하고 고소한, 깔끔하게 똥을 발라낸 매콤한 멸치볶음, 퍽퍽한 목살 같은 돼지고기와 감자 등을 넣고 은근하게 끓여낸 고추장찌개, 갓 구워낸 고등어나 꽁치구이, 슴슴하고 부들부들한 무나물, 김과 김치. 밥과 찌개에 3~4개 정도의 정갈한 반찬, 그리고 식탁 앞에서 내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나를 지켜봐 주셨던 이모. 그 시절 그 순간에는 맛있는 음식과 이모가 있었다. 이모는 늘 내가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보셨다. 그러면서 사는 이야기나 동네 사람들 이야길 하셨다. 501호 누구는 어쩌고, 이모 동창 누구 딸이 어쩌고.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도 않고 기억할 수도 없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다 보면 이내 머리가 아파져 왔다. 가끔은 그런 행위들이 이모께서 차려주신 밥을 먹고 지불해야 하는 비용처럼 느껴져 습관적 맞장구가 피곤할 때도 있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엄마밥보다 이모밥이 그립다.
C와 함께할 땐 거의 맛집을 찾아다녔다. 내가 찾았다기보다는 그쪽에서 늘 데이트 코스를 준비해왔다. 스파게티나 피자, 커피숍 등 ‘데이트’라고 불릴만한 메뉴가 대부분이었고 그와 함께 다녔던 곳은 다 맛이 좋았다. 그는 맛뿐 아니라 멋에도 관심이 있었다. 우리는 취향도 잘 맞았다. 음악회를 다녔고, 미술관을 다녔다. 그는 첫 연애였고 나도 그와 다를 바 없었다. 우리는 영혼의 단짝인 줄 알고 열렬하게 사랑했지만, 열정적으로 타오르던 불씨는 금세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C와 함께했던 맛집을 더는 찾아다니지 않는다.
B와 함께할 땐 늘 고기를 먹었다. 함께한 시간 동안 다른 메뉴를 먹은 기억이 거의 없다. 고기와 커피, 그게 전부다. 회, 주꾸미, 소고기, 삼겹살 등 다양한 고기류를 섭렵했고, 그중에 제일은 삼겹살이다. 삼겹살을 유난히도 부르짖던 그 사람, 우리의 마지막 식사도 삼겹살이었다.
N과 함께 식사를 ‘즐기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365일 언제나 다이어트를 하고 있었기에 어떤 음식이든 개미 눈곱만큼 먹었고, 배부르다며 절반 이상 남기곤 했다. 남겨진 음식이 보기 싫었던 나는 언제나 찬반 처리반이 되었다. N과 함께 식사하면 종종 배부른 불쾌감이 들곤 했다. 이럴 거면 차만 마시고 헤어질걸. 어떤 메뉴든 가리지 않고 먹질 않았기에 맛있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 같은 걸 느껴본 기억이 없다. SNS에 공유된 N의 데이트 사진에는 언제나 맛있게 먹었고, 배부르다는 글이 남겨있지만, 그가 정말 맛있게 배부르게 먹었을지, 뭔가 먹긴 하는 건지 늘 궁금하다.
사람과 맥주를 좋아하는 J 덕분에 수제 흑맥주의 맛을 알아버렸다. 이전에도 기네스나 코젤 다크 같은 진한 흑맥주를 좋아하는 나의 취향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J 덕분에 흑맥주의 스펙트럼이 넓어졌다. 스타우트에는 브라우니와 올리브가 참 잘 어울렸다. 속상할 때 꿀꺽꿀꺽 마시는 술 말고 기분 좋게 홀짝이는 맥주의 맛을 알게 되었다. J와 자주 만나지 않는 요즘은 맥주 따위와 멀어진 지 오래다.
K가 소개하는 곳은 전부 기념할만하다. 음식점이나 예쁜 공간, 전시회 등 영감을 받을만한 핫플레이스를 상당히 구체적으로 분류하여 정리하고 있고, 이따금씩 소개해준다. 가장 좋았던 곳은 이디야 커피랩이다. 보급형(?) 프랜차이즈 커피 본사가 뭐 얼마나 하겠나 싶은 마음으로 방문했지만, 그 후 다른 지인과 세 번을 더 방문했다. 맛과 멋 분위기 모두 굉장한 공간이었다. K가 소개하는 곳은 무조건 좋다. 공간이나 음식 맛이 주는 매력도 상당하지만, 사실 K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좋다.
평소 간단하게 때우는 식사를 하는 편이다. 어릴 적부터 길들여진 식습관 덕분에 삼시 세끼 같은 음식을 먹어도 상관이 없다. 한솥 가득 끓인 청국장에 밥 말아먹고, 두부나 고기류를 넣어 한 번 또 끓이고, 남은 국물에 라면을 넣어 또 먹는다. 내게 식사란 배고프지 않기 위해 먹는 것이지만, 사람이 더해지면 의미가 달라진다. 맛이 우선순위인 상대방과 함께라면 나도 맛 좋은 음식을 먹게 된다. 역시 내겐 맛보다는 ‘함께’가 먼저다. 좋은 것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 ‘너와 내가 함께한 시간이 만족스럽다.’가 ‘맛있다’로 기억된다. 이런 걸 푼크툼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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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서울 국제도서전의 ‘리미티드 에디션’ 맛의 기억은 권여선, 김봉곤, 박찬일, 성석제, 안희연, 오은, 이승우, 이용재, 이해림, 정은지 이상 10명의 작가가 ‘맛’을 모티브로 쓴 글을 엮었다. 각양각색 작가들의 글을 읽다 보니 ‘나의 맛의 기억’도 기록하고 싶어 졌다. 그런 의미에서 참 재미있는 책이다. 그중 이승우라는 작가에게 관심이 갔고 조만간 이승우의 소설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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