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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고 또 읽기/인문

[책 리뷰]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 마이클 부스. 김경영 옮김. 글항아리. (2018)


[완독 2019-31 / 인문, 서양문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 마이클 부스. 김경영 옮김. 글항아리. (2018)

어릴 적 먼나라 이웃나라를 적당히 읽은 게 유럽사에 대한 아는 전부이다. 고3 때 교과목이었던 세계사는 수능 과목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과서의 존재만 아는 정도. 특히 북유럽에 대해서는 문외한 수준, 북유럽 에세이를 읽게 되었다.

유럽인이 바라본 북유럽의 시선. 수다쟁이 영국 남자의 시선이 부산스럽고 정신없게 느껴졌다. 북유럽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니 내용 전체를 파악하고 몰입할 수도 없었다. 책장을 넘기며 막연히 알던 북유럽의 평화 같은, 이방인으로서 좋아 보이던 휘게의 본모습을 알게 되었다. 막연하게 동경하던 유럽은 이책에 소개된 북유럽도 그리스 로마 같은 남부도 아닌, 영국, 프랑스 중심의 유럽이었다는 사실도. 북유럽을 구성하고 있는 덴마크, 핀란드,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다섯 나라를 나라별로 구분하여 저자의 느낌적인 정리로 소개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비슷한 느낌이 든 건 서양인이 한·중·일 세 나라를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는 이유와 같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북유럽을 낯설게만 여겼는데, 생각보다 생활 가까이에 있었다. 지난주 다녀온 ‘그림책 now’ 전시회에 소개된 일러스트 작가 중 상당수가 덴마크 작가였다. 그리고 지난 2월에 ‘학교를 바꾸는 교육’ 세바시 강연으로 들었던 바니스 매카시 등의 강연자들은 핀란드 사람이었다. 이미 주변에 존재하고 있던 툭툭 끊어져 있는 정보들을 이 책에서 읽은 정보를 통해 나만의 연결고리로 연결하고 나니 조금 견고해졌다. 지난 2월 세바시 강의 때 문화가 다르기에 고민도 다를 수밖에 없다고 느꼈던 핀란드의 공교육 제도가 이해되었고, 덴마크인들의 사고방식이라면 충분히 표현될 수 있는 그림책 그림들이었다.

사람 사는 덴 다 똑같구나 싶은 만큼 외부인으로서 좋아 보이던 휘게나 얀테, 라곰을 비꼬는 저자의 시선이 통쾌했지만, 시종일관 구시렁구시렁 대는 말투가 거슬렸다. 수다가 정말 많고 정신없는 예능인 두 세 명이 정치 얘기를 늘어놓는 것 같았다. 내가 이해력이 늦은 건지-늦긴 하다.-, 번역이 서툰 건지 헷갈렸지만, 이런 도전과 시도를 한 것에 의미를 둔다. 이 글의 문투가 저자 마이클 부스 개인의 개성인지, 영국인들의 문화가 이런 방식인지 궁금하다. 혹시 내가 개인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책을 읽어서 핵심을 놓치고 더 정신없게 느낀 건 아니었을까? 각 나라에 대한 약간의 객관적 정보나 설명이 추가되었다면 어땠을까? 이렇게 개성 강한 상태로 살아도 괜찮은 북유럽에 내가 태어났다면, 그곳에서 살 수 있다면 어땠을까? 여러 생각과 아쉬움이 남는 책이었다.



덴마크인 둘 이상이 모이면 반드시 시작하며 덴마크식 저녁 만찬을 한정 없이 질질 끌게 만드는 합창이 아니었다. 중간 합의점을 향한 휘게의 압제적이고도 끈질긴 추진력, 논란이 될 만한 대화 주제는 무조건 피하려는 고집, 모든 상황을 가볍고 경쾌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 시종일관 편안하고 자기 만족적 소시민인 척 잘난 체 - 필요에 질려서였다. (135)

우리가 그런 행복도 조사에서 늘 1위를 차지하는 이유는 연초에 우리의 기대치를 묻기 때문이야. 그러고는 연말에 그 기대를 충족했는지 물어. 연초에 우리 기대치가 너무 낮아서 쉽게 채울 수 있는 거야. (155)

이런 자세는 덴마크인이 행복한 또 한 가지 비결일 수도 있다. 나는 이런 자세가 모든 종류의 장기적 행복에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참되고 깊고 지속적인 기쁨을 위해서는 대개 엄청난 부정이 필요하며, 부정은 덴마크인에게 차고 넘치는 능력이다. 물론 자기 부정 이야기가 아니다. 덴마크인의 알코올, 담배, 대마초, 설탕 소비량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덴마크인은 몇 안 되는 즐거움마저 포기한다. 가령 덴마크인으로 살아가는 데 드는 비용, 즉 세금을 내거나 가게에서 제품을 사는 데 드는 순수 비용 및 야망과 역동성의 상대적 부족 그리고 가끔은 필요한 갈등의 거부, 얀테의 법칙과 휘게로 부정되는 표현의 자유와 개성의 상실이라는 면에서 드는 정신적 비용 말이다. (159)

“사고방식과 정체성을 형성하던 시기라 핀란드 학교는 선구자가 되어 횃불을 들고 나라를 비출 교사들을 채용했고, 그런 의미에서 교사들은 그 이후로 줄곧 그 점에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스케이닌 교수가 말했다. 초기 핀란드 교육의 본질은 생존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목공부터 바느질까지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 교사들은 ‘민중의 촛불’로 불리며 핀란드가 자립으로 가는 길을 밝게 비추는 역할을 했다. (253)

어떤 사람도 공장에서 일하거나 기술자가 되고 싶어 하지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유명해지길 원하죠. (...) 사람들은 지금의 세상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무엇도 절박하지 않거든요. 내가 내일 출근할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어떻게든 굴러가니까요. 병가는 1990년대 이후로 계속 늘어났습니다. 사람들이 감기에 더 자주 걸려서가 아니라 회사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입니다. (390)

노르웨이인은 늘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지내는 경향이 있었다. 심지어 자기네 나라 안에서도 넓게 흩어져 산다. 서로 최대한 거리를 두려는 듯이. 심지어 노르웨이 인이 엄청난 용기와 독창성을 발휘해 세계로 나가 정당하게 축하받은 탐험을 할 때도 역시나 사람이 별로 없을 만한 곳인지 아주 신중하게 고려한 뒤 탐험을 한 것 같다. (392)

나는 버터 없는 토스트를 씹는 성질 고약한 부자 노르웨이인이 되느니 차라리 버터 쿠키를 입안 가득 베어 문 매 맞는 유럽 연합의 시민이 되고 싶다. 석유를 판 돈이 넘쳐나는 작은 나라에서 국민에게 버터 같은 기본 생필품을 공급할 수 없다니 대단히 아이러니하다. (...) 노르웨이인이 모든 요리를 마가린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집에서 구운 우리 스웨덴 전통 사프란 빵이 훨씬 맛있을 것이다. (...) 사덴프로이데, 즉 남의 불행에서 기쁨을 느끼는 태도는 썩 유쾌하지 못한 일이지만, 화목해 보이는 스칸디나비아 삼두정치의 표면 아래 곪아 터지는 적나라한 분노와 질투를 잘 보여준다. (395)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는 졸음, 평화, 안정감, 고요의 느낌도 당연히 북유럽 사람들이 누리는 안전감과 삶의 질, 더 나아가 행복의 핵심이다. 하지만 안전, 기능, 합의, 중용, 사회적 결속이 삶의 전부는 아니며, 단지 수많은 욕구의 토대일 뿐이다. (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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