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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고 또 읽기/에세이

[북 리뷰] 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김명남 옮김. 바다출판사. (2020)

[2020-32/에세이] 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김명남 옮김. 바다출판사. (2020)

요즘 나는 좋은 날일 때도 있고, 나쁜 날일 때도 있고, 그저 그런 날일 때도 있다. 그리고 아마도 최고의 날은 어떤 날인지 생각조차 해보지 않는 날일 것이다. 내가 음식을 결정의 수단으로 사용했던 것이 마지막으로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몇 시간 넘게 굶주린 것이 마지막으로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음식이나 몸무게를 절대 걱정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둘 다를 무척 의식하면서 산다. 내가 음식에 대해서 완벽하게 '정상'이 되는 날이 오기나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만약 정상이라는 것이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면, 오늘날의 이 문화에서 완벽하게 '정상'인 여성이 한 명이라도 있을지 잘 모르겠다. (175)

 

최근 가장 많은 교류(!)를 했지만 한 번도 본 적은 없는, 존경(?)하는 지인으로부터 '명랑한 은둔자'를 추천받았다. 글쓰기와 삶에 도움이 될 거라 하셨다.

평소 나는 남이 추천하는 책을 즐기지 않는다. 남들의 권유가 오롯이 나를 위한 배려나 친절로 느껴지지 않는 까칠한 성격 때문이기도 하고, 남들 다 하는 대로 따르고 싶지 않은 삐뚠 마음 덕분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 책은 최근 전적으로 의지(!)하는 분의 추천이기에 큰 고민 없이 데려왔다.

 

2020년 9월 출간된 이 책은 2002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캐럴라인 냅의 살아생전의 에세이를 엮은 회고집이다. 정신분석가 아버지와 화가 어머니 사이에서 쌍둥이로 태어난 작가는 브라운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20여 년 가까이 저널리스트로 살았다. 작가는 '중독'에 대해 솔직하고 대담하게 분석하고 서술하는데, 알코올 중독, 다이어트, 반려견을 향한 집착을 담은 책을 발표한 적이 있다. (책 소개 참고)

 

음식을 관리하는 일은 삶을 관리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약간의 시간, 약간의 자기 이해, 약간의 용기, 많은 지지를 한데 모으면, 누구나 서서히 대처할 방법을 알게 된다. 자신을 먹일 방법을 알게 된다. (175)

 

이미 십수 년 전 세상을 떠난 작가의 에세이를 굳이? 왜?라는 물음으로 책장을 넘겼지만, 궁금증은 이내 사라졌다. 생전에 세 권의 책과 사후에 두 권의 책을 낸, 20여 년 전에 사망한 작가의 에세이를 '명랑한 은둔자'라는 제목으로 통합. 요약하여 2020년 가을, 신간으로 펴낸 김명남이라는 편집자가 궁금해졌다.

 

카이스트 화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환경정책을 공부한 저자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편집팀장을 지냈고, 현재 전문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로 제55회 한국 출판문화상 번역상을 수상했다. (책날개 참고)

 

캐럴라인 냅이라는 사람의 글과 인생에 푹 빠져서 빠르게 책장을 넘길 수 없었다. 그건 내가 슬프거나 무서운 영화를 보지 않는 이유와 같다. 그 감정 속에 푹 빠졌다가 다시 헤어 나오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역자가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책은 아니지만, 저자의 삶에 푹 빠질 수 있게 만든 구성과 편집, 목차에 감탄하며 나도 언젠가 멋진 책을 쓰고 싶어 졌다.

하지만 캐럴라인 냅처럼 힘겹게 살고 싶지는 않으니 이런 명작은 평생 동안 못 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명랑한 은둔자'를 대하는 나의 복잡 오묘한 마음처럼 다른 이들도 그런 매력을 느끼기에 이 책이 출간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된 걸까? 다른 사람들의 책 후기도 궁금하다. 2020년 코로나 시대의 가을에 딱 어울리는 책이다.

다들 안녕하신가요?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존중받아야 할 존재라는 생각은 이제 사실상 반박의 여지가 없는 생각이다. 여자가 하는 노동의 가치가 남자가 하는 노동의 가치와 동등하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신념을 철저히 내면화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우리가 그런 신념을 뼛속까지 새겨서 적절한 말을 - 가령 "싫습니다" "아쉽지만 그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같은 말을-술술 내뱉게 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아직은 너무 많은 여자들이 착해야 한다는 부담을 짊어지고 있다. 우리가 남들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가정, 인간으로서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고(복잡한 사람이다) 어떤 행동을(일을)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행동하는가(상냥하게 행동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가정을 짊어지고 있다. (...) 무력감을 떨치고, 분노를 경험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억지로라도 익히고, 자신의 감정과 요구를 남들에게 정확하게 말하는 기쁨을 배우자. (244-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