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완독 2019-53 / 사회과학] 주목하지 않을 권리. 팀 우. 안진환 옮김. 알키. (2019)

우리 삶의 경험은 생이 끝나는 시점까지 선택에 의해 그랬든 무심히 그랬든 주의를 기울였던 모든 것과 동등하다. (514)

무의식적이고 습관적인 패턴으로 나의 시간을 갉아먹는 SNS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몇 개의 앱을 깔았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하는 중이다. 업무상 필요한 순간도 있기 때문에 업무만 마무리하고 다시 하던 일로 돌아오면 되는데, 나의 무의식은 그곳에 머무르기를 원한다. 업무 때문에 시작한 것이 10분이 흐르고 30분이 흐르고, 한 두시간이 훌쩍 흘러간다. 돌아서면 의미 없는 인터넷 서핑이나 SNS 사람들 일상 구경, 유튜브 등을 이성적으로 그만두고 싶어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책이 ‘주목하지 않을 권리’(알키, 2019)이다. 시공사의 자회사(?)쯤으로 느껴지는 알키출판사의 신간. 시공사는 왠지 모를 이미지(!) 덕분에 읽기를 꺼리곤 했는데, 역시 대형 출판사여서인지 책이 야무지다. 내가 읽은 비슷한 느낌의 책으로 몇 년 전 읽은 다산초당의 혐오사회(다산초당, 2017)과 관점(와이즈베리, 2018) 등이 있다.

지금의 나를 못살게 구는 SNS를 끊어내고 싶어 읽기 시작한 이 책은 생각보다 상당한 사회과학적 지식을 담고 있다. 수 세기 전, 신문이나 방송 속 광고가 생겨나기 시작할 때부터 누군가를 ‘주목’하기 위한 목적을 담은 행위와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 목적은 단순한 관심일 수도, 금전적인 목적에 의해 생겨났을 수도 있지만, 오늘날 내게 닥친, 단편적인 SNS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읽으며 충격으로 다가왔다.

우리의 현 상황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한 세기 전에는 거의 존재하지도 않았던 어떤 산업이 극적이고 인상적으로 부흥하면서 오늘의 결과를 낳은 것이다. “주의력 사업”이 바로 그 산업이다. (...) 각각의 거래가 윈윈으로 보인다는 전제하에 그것들 모두는 엄청난 총량으로 인간의 살아가는 방식에 더욱 모호하면서도 심오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3)

뉴스에서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같은 방송으로, 컴퓨터에서 핸드폰으로 점점 사람들의 삶 속에 정교히 침투하는 이것들. 구글, 페이스북, 유튜브 등의 실제 목적은 우리 삶을 편리하기 위함이 아니라, ‘광고주로부터 많은 광고를 받아 수익을 창출하는 것’인데, 나는 아주 쉽게 그들의 상술에 빠져 생각과 시간을 소비하고 있었다. ‘주의력 사업가’라는 용어는 다소 생소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내 삶 여러 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존재의 무서움을 느꼈다. 읽기 쉽지는 않지만, 지금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향해 살아가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일깨우게 하는 책을 읽을 수 있어 의미 있었다.

Posted by 따듯한 꽃.개

댓글을 달아 주세요




[완독 2019-23 / 사회과학, 노동] 그림자 노동. 이반 일리치. 박홍규 옮김. 미토. (2015)

만일 당신이 통근 시간대를 피하여 통근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성공한 것이다. 만일 당신이 자택에서 아기를 낳을 수 있다면 당신은 필경 엘리트 학교에서 공부한 것과 같다. 당신이 병들었을 때 의사에게 가지 않고 스스로 낫는다면 당신은 타인이 모르는 특별한 지식에 정통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신선한 공기를 호흡할 수 있다면 당신은 부유하고 행복한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오두막을 지을 수가 있다면 당신은 결코 가난한 것이 아니다. (23)

요즘은 사회과학 분야 그중에서도 노동에 관한 책을 즐겨 읽는다. 그림자 노동 같은 걸 하는 게 지금 나의 직업이기 때문인가 보다. 오늘은 퇴근 무렵 아주 불쾌한 경험을 했다. 고객이라는 이름으로 영업 전략 떠봄과 몰아 붙임을 당했다. 내게 무언가 물어봐 놓고 대답을 듣지도 않고 대답을 가로막은 후 다음 질문을 해댔다. 어쩌라는 건지.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다가 갔다. 이런 게 그림자 노동인가? 내게 요구되지 않았지만, 서비스직종으로서 견뎌야 하는 감정 소비+낭비의 시간. 요즘 직업적으로 느끼는 허무함을 극복하고자 사회비판이나 노동 관련 분야의 책을 즐기나 보다. 세상사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만 이렇게 힘든 게 아니라는 위로를 받고 싶어서.

그런 의미에서 이반 일리치의 그림자 노동은 꼭 한번 읽고 싶었지만 어려웠다. 이 책을 처음 펼친 지 수개월이 지났고, 드디어 어젯밤 꾸역꾸역 다 읽었다. 사회비판이나 노동 경제를 논하기엔 나의 앎의 깊이가 충분하진 않지만, 나라는 사람은 정체되어 고여있지 않음을 추구하는 사람이니까. 덮어버리고 다음 책을 보면 그만이지만, 지금 내 상황의 가장 큰 불만을 해결하고 싶다는 욕구로 읽어냈다. 장하다.

책장을 덮었지만,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한물간 사상가 이반 일리치의 사상을 요즘 누가 즐기는지 모르겠지만, 나라는 사람 자체가 유행의 흐름대로 세상사를 대하는 사람이 아니니 그런 건 문제 되지 않았고,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들이 이반 일리치의 책 속 문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의견이 궁금했고 지금의 나를 깨우치려면 철학 같은 뜬구름 이야기 말고 이런 글도 필요할 것 같았다.

이 책은 총 5장으로 구성되어있다. 1장에는 이반 일리치가 바라보는 세상의 불합리한 구조를 나타낸다. 2, 3, 4장은 세계사 속에 등장하는 ‘보통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다른 의미를 담아 행했던 행동들이 사실은 그림자 노동을 품고 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지막 5장은 이반 일리치가 생각하는 요즘의 그림자 노동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글을 읽는다는 것이 가진 사회적 의미, 모어와 토박이 언어의 차이, 언어를 학습함으로써 가정에서 당연히 누려야 할 부모와 아이 사이의 교류가 학습자와 교수자 사이의 관계로 변질되었다는 점, 상류의 언어를 알고 있는 것이 계급을 쟁취할 수 있다는 점, 민중에 ‘의한’ 연구인지 민중을 ‘위한’ 연구인지 그 의미가 어떻게 섞여버리게 된 건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성의 임무가 그림자 노동으로 취급받게 된 필연적 요소들. 살면서 평상시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이런 내용을 접할 때마다 나의 무지가 부끄럽고, 더 많이 알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방향성과도 맞닿아 있는 이 사람의 글을 살면서 계속 알아가고 싶다.


위그의 과학과 우리의 과학이 어떻게 다른지 제대로 알려면, 우리는 딘디무스처럼 위그의 용어에 충실하게 과학을 필로소피아로 말하긴 하되 다음과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딘디무스가 말하기를, 과학이란 “잘 알려진 것을 소중히 아끼는 사랑의 태도라기보다는, 이미 맛보았고 그래서 만족을 얻었던 것을 더 얻으려는 욕망에 이끌린 사려 깊은 진리 추구”라는 것이다. (...) 이것은 오늘날 ‘민중에 의한 과학’ 말고는 마땅한 이름이 없다. (153)

이성으로는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 -안토니오 그람시. (...) 일리치를 읽는 것은 나 자신과 이 사회를 재발견하고 우리 자신에 대한 희망을 다시 세우는 일이 될 것이다. (240)



Posted by 따듯한 꽃.개

댓글을 달아 주세요



[완독 2019-13 / 사회과학. 노동]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이반 일리치. 허택 옮김. 느린걸음출판사. (2014)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이 신종 가난을,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간에 벌어진 소비 격차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날이 갈수록 인간의 기본적 필요가 상품이 되어가는 세계에서 점점 더 벌어지는 이 소비 격차는 전통적 가난이 산업사회의 방식으로 드러나는 모습이며, 기존의 계급투쟁이라는 개념으로 이 격차를 적절히 노출시키거나 줄일 수 있다. (9)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세상과 접촉하지 못한 채 지내고, 누군지 모르는 사람을 위해 일을 하고, 자신이 느끼는 것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살아간다. (12)

현대화된 가난이 인간에게 끼치는 직접적이며 구체적인 결과이며, 그것을 견뎌내는 인간의 인내이며, 이 새로운 비참함에서 벗어날 가능성이다. (15)

인류 역사에서 그 시대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가늠하는 가장 정확한 척도는 먹는 음식 중 사서 먹는 음식이 차지하는 비중이다. (32)

학교라는 곳에 가본 적 없는 멕시코 오악사카주 인디언이 지금은 졸업장을 ‘따기’ 위해 학교에 끌려간다. 이들에게 졸업장이란 자신들이 도시인보다 얼마나 열등한지를 정확하게 측정해주는 증서이다. 그나마 이 종이 한 장이라도 없으면 도시에 나가 빌딩 청소부 일도 할 수 없다.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이런 것이다. ‘필요’가 현대화될 때마다 가난에는 새로운 차별이 하나씩 더 붙는다. (35)

이반 일리치에 대한 관심으로 연달아 몇 권을 빌려왔다. 그중 가장 빠르게 완독한 책. 얇지만 깊이가 있어 쉽고 빠르게 읽지 못하는 이반 일리치의 책은 나의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켜주기에 참 좋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나름대로 고급(?) 교육을 받은 지성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학력을 소유하고 있지만, 몇십년 전 유럽 저편에서 살던 이반 일리치 같은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한 문장 한 문장 읽다 보면 나는 그동안 무얼 배우고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었나 반성하게 된다. 곰곰이 곱씹으며 나는 과연 가치 있고 쓸모있는 일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나의 직업에 대하여 돌아보게 된다. 하지만 생계에는 의미보다는 책임감이 우선일 테니 일단은 먹고사는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차근히 일하는 게 우선이겠지.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마음의 눈을 키운 후 또 한 번 읽고 싶은 이반 일리치의 책. 오랫동안 곁에 두고 즐겨 읽고 싶다. 오랜만에 호감 가는 사람이 생겼다. 죽은 사람이지만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아야겠다.

Posted by 따듯한 꽃.개

댓글을 달아 주세요




[완독 2019-4 / 사회과학. 비평 칼럼] 대리사회. 김민섭. 와이즈베리. (2016)

요즘 읽는 책 두 권이 묘하게 닿아있다. 한 권은 와세다 글쓰기 표현 강의(엑스북스, 2018)이고, 또 한 권은 대리사회(와이즈베리, 2016)이다. 연두색 표지색이 똑같고, 좋은 글쓰기가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닮았다. 다른 점은 한 권은 직접적인 글쓰기 방법을 알려주지만, 딱히 와닿지 않고, 다른 한 권은 르포르타주의 형식(글쓰기책이 아님)으로 대리운전자로 사는 삶을 잘 쓴 글쓰기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남을 대신하는 사회, ‘대리(代理)사회’인 줄 알았는데 ‘대리’운전에서 나온 대리였다. 하긴 대리운전도 ‘代理’이긴 하지. 훈의 시대(와이즈베리, 2018)를 읽고 김민섭의 다른 책이 궁금하여 찾아 읽게 된 대리사회는 글작가를 업으로 삼고 싶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대리운전 기사로 밥벌이를 하는 저자의 삶이 담겨있다. 직업의 귀천을 넘어서서 좋은 글이 있다는 점에서 이 책 대리사회는 월간지 ‘작은 책’과도 닮아있다. 저자처럼 나도 나의 분야에서 글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이 마구 생기는 책이었다.

어쩌면 가족은 끊임없이 서로를 위한 ‘대리’로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나는 너를 위해, 너는 나를 위해, 우리는 너를 위해, 그렇게 끊임없이 주체와 대리의 경계를 넘나든다. 나는 아직 모든 가족을 주체로 두는 방법을 잘 모른다. 하지만 아내하고든 아이하고든, 조금은 더 많이 대화하려고 한다. 기꺼이 그들을 위한 대리의 삶을 살며, 그렇게 조금은 더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다. (105)

갑과 마주하려는 을의 앞을 막아서는 것은 또 다른 을’들’이다. 그들은 한 걸음 물러서거나 밀려난 을에게 “너는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갑의 욕망을 대리하는 대리인간이면서도, 자신을 그 공간의 주체로 굳게 믿는다. 자신들이 괴물이 되었음을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노는 주변의 을이 아닌 저 너머의 갑을 향해야 하고, 공고하게 구축된 시스템에 닿아야 한다. 모두가 돌아서서 갑과 마주하고, 대리사회의 괴물과 싸워나가야 한다. (178)

그 누구도 가르쳐준 바 없지만, 결국 우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야 한다. 밀려나기는 쉽지만 스스로 물러서기는 어렵다. 그것은 공간의 주체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고 절대로 패배가 아니다. 그러고 나면 시스템의 균열이 보다 선명하게 보인다. 그 균열의 확장을 통해, 그동안 자신의 욕망을 대리시켜 온 대리사회의 괴물과 마주할 수 있다. 그때부터는 ‘사유하는 주체’가 된다. 여전히 행동과 언어는 통제될지라도, 정의로움을 판단하고 타인을 주체로서 일으키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강요되는 천박한 욕망을 거부할 용기를 얻는다. 우리 모두는 경계에 있다. 다만, 한 걸음만 물러설 용기를 가지면 된다. 대리인간으로 밀려날 것인지, 스스로 물러서고 다시 나아오는 주체가 될 것인지,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252)



Posted by 따듯한 꽃.개

댓글을 달아 주세요

[완독 2019- 3 / 사회과학. 사회학]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이반 일리치 지음. 신수열 옮김. 사월의 책 (2018)

제주도에 사는 지인과, 지인의 지인을 응원하기 위해 무명서점에서 구매한 책 두 권 중 하나,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를 완독하였다. 무명서점이라는 공간에서 느꼈던 따듯함이나 뭉클함 덕분에 책 소유를 즐기지 않는 나인데 선뜻 두 권을 담아왔다.

*무명서점은 제주도 서귀포시 한경면에 있는 독립서점이다. ‘시, 사랑, 정치, 자연’이라는 4가지 주제로 큐레이팅 되어 있다. 주류출판사의 신작과 베스트셀러 위주로 전시되어있는 대형서점을 주로 찾는 사람이라면 색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무명서점에는 예스럽고 아리송한 가구들이 많은데, 주인장이 지인에게 기증받은 가구들이다. 부조화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공간을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제주 곳곳에 수많은 독립서점이 존재하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곳에 방문하기를 추천한다. 도심의 화려한 어느 서점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기분 좋은 설렘과 따듯함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환경과 적정기술에 관한 관심, 자전거를 탈 때 느낄 수 있는 바람을 좋아한다. 이런 가벼운 호기심으로 이 책이 지닌 무게를 전부 이해하긴 어려웠다. 속도와 시간이 돈으로 환산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수송산업이 지닌 부조리한 패러다임을 1인당 에너지 사용량과 총에너지 사용량으로 아주 친절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용어 자체를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끓는 냄비 속 개구리처럼 알면서도 행동하지를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얇고 가벼운 무게의 책이지만 글자를 훑어낸 정도를 완독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의 이해가 조금 깊어졌을 때 한 번 더 읽어야겠다.

‘풍요로의 해방, 의존으로부터 해방.’

이 책에서 이반 일리치가 말하고자 하는 ‘풍요와 의존으로부터 해방’은 에너지 사용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환경, 경제, 관계 등 나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해할 수 있을 듯 말듯 어려웠지만, 궁극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있었기에 좋은 스승님을 만난 기분이 든다. 이반 일리치의 그림자 노동(미토, 2005)을 다음 책으로 골랐다. 이 책 만큼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나의 무지를 한 덩어리 덜어낼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된다.

공간의 사회적 재구성을 통해 우리가 서 있고 걷고 생활하는 곳이야말로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을 모든 이가 끊임없이 새롭게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여야 한다. (104)

에너지로부터의 해방은 가난한 이들에게는 돈이 별로 들지 않은 일이지만 부자들에게는 호된 비용을 요구한다. 하지만 수송체계의 속도 증가로 인해 교통이 멈추는 즉시 부자들은 더 높은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106)

Posted by 따듯한 꽃.개

댓글을 달아 주세요



[완독 78 / 사회과학, 정치] 위험한 민주주의. 야스차 뭉크. 함규진 옮김. 와이즈베리. (2018)

러셀은 우리의 섣부른 미래 예측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만약 과거에 일이 잘 풀렸다고 해서 그 원인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면, 우리는 순진한 닭과 같은 꼴일 것이며, 미래에도 계속 잘될 것이라고 낙관했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닭이 언젠가 세상이 끝장나리라고 예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앞으로 닥칠 변화들을 알 수 없을 것이다. (25)


‘위험한 민주주의의 저자 야스차 뭉크(yascha mounk)는 포퓰리즘의 부상과 민주주의의 위기에 관한 연구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학자이다. 그는 폴란드 부모에게 독일에서 태어났고, 현재 하버드 대학에서 정치 제도를 강의하고 있다. (책날개 참고)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가장 흥미로운 일은 아마도 ‘정치’가 아닐까. 한 번 맛보면 절대 놓칠 수 없다는 권력이라는 것을 두고 누구의 편에 설 것인지, 어떤 관점을 취할 것인지 자신 혹은 우리의 이익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그것. 우리나라에서도 6월 13일에 치러진 지방선거로 지난 정권을 심판하려했지만 아리송한 부분도 있었다. 민주주의의 약점을 이용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한 표의 흐름을 장악하려는 정당과 선거 관계자들의 눈치 싸움 덕에 한 시민으로서 질려버렸다. 누구든 당선된 사람이 바르게 일해주었으면 하는 바람 뿐이다.

박근혜 정권 이후 정치에 관한 관심이 커졌다. 현직 교사모임인 교양 사회 교사연구회에서 만든 ‘쓸모 있는 인문 수업 정치학’(이름북, 2018)은 학창시절 교과로 배운 정치에 대한 깊이를 넓힌 기분이다. ‘위험한 민주주의’는 무엇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지를 파고든다. 권력을 얻기 위한 투쟁이라고 생각했던 정치가 철학, 심리, 경제 등 여러 사항으로 만들어진 표퓰리즘으로 우리의 판단을 흔들리게 만든다는 것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저자는 트럼프와 힐러리의 사례를 예로 들며 표퓰리즘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설명하며 무너지고 있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언급한다. 그리고 그 위기의 원인을 소셜미디어, 경제 침체, 민족 정체성으로 정리한다.

폴란드계 독일인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저자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설명하는 이 책 3장을 박근혜 정부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였다. 눈을 비비며 책장을 앞으로 다시 넘겼다. 분명 공동 저자가 아닌데. 외국인이 보기에도 우리나라의 지난 정부가 참 어이없고 한심해 보였나 보다. 부끄러운 역사의 한 장면을 세계인들이 함께 알고 이런 책의 예로 다루었다니. 일제 치하 시기를 겪은 것도 원통한데 치욕스럽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인종적, 종교적, 경제적인 이유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우를 범했다.

그래서 결론은?
신념을 위해 싸우자.
스토아학파의 가르침을 예로 들며 알 수 없는 미래지만 신념을 위해, 옳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서론과 본론의 전개에 비교해 결론은 모호하다. 아마도 정치는 현재진행형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렵고, 현재 나의 상황과 상관없는 일이 벌어지기 일쑤지만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보이지 않는 눈처럼 누군가 지켜보고 있으니 긴장하고 옳은 선택을 해야 한다고, 여기 한 사람이 깨어 있음을 알려야 한다.

어렵고 지루했지만, 이 사회에서 투표권을 행사하는 시민이라면,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천천히 읽어볼 만한 책이다.



온갖 바람직한 것들을 민주주의 개념에 갖다 붙이려는 경향은 민주주의가 가장 정의로운 체제를 위한 용어로 남기를 바라는 철학자들에게 특히 두드러진다. 이들 대부분은 빈곤이나 불평등이 만연한 상황 같은 부정의를 극복하는 데 성공한 나라를 꿈꾼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민주주의의 최소 개념을 고안하려 한 정치학자들조차도 자유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의회나 법원과 같은 기관들 사이의 구별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38)

러셀의 닭이 자기 체중이 4파운드에서 5파운드로 늘어났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경험해본 적이 없는 것처럼, 우리는 성장 없는 풍요로움이 자유민주주의의 정치적 역동성에 주는 영향을 예측하는데 도움 될 만한 역사적인 전례를 갖고 있지 않다. (208)

철학의 가르침에는 깊은 지혜가 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매번 예측한다면 옳은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누군가 실질적인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그는 행동하지 않거나 묵인하는 쪽으로 스스로를 유도할 것이다. (...) 내가 실제로 위험한 결정에 직면한다면, 나는 옳은 일을 하려는 다짐을 할 것이다. (338)



Posted by 따듯한 꽃.개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