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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고 또 읽기/인문2020. 3. 29. 21:57

[2020-12/인문학, 글쓰기] 소설을 살다. 이승우. 마음산책. (2019)

왜 나는 내 고향이 떳떳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내가 떳떳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떳떳하지 않았을까. 아, 나는 죄를 지었다. 존재의 기반을 폐하고자 하는 나의 낡고 오만한 자의식은 시간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시간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고향과의 거리가 반대로 좁혀지는 것을 느낀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나의 문학이 고향을 향해 나아가는 낌새를 챈다. 고향이 어찌 한낱 산천이겠는가? 고향은, 말하자면 위대한 서사의 공간이다. 나무 나무마다에 기억이 잠자고 있고, 길모퉁이마다에 이야기가 숨 쉬고 있다. 고향이 어찌 한낱 자연이겠는가? 고향은 기억의 근원인 것을, 존재의 밭인 것을. 문학이 그것을 어떻게 외면하겠는가. (29)

자유가 사랑으로 행해지고 사랑이 자유로 행해져서, 서로가 서로 속으로 깃들면서 행해질 수만 있다면야 사랑이고 자유고 굳이 나눠 따질 일이 없겠지만, 이 섬에서 일어난 일들로 해서는, 자유라는 것 속에 사랑이 깃들기는 어려웠어도 사랑으로 행하는 길에 자유는 함께 행해질 수가 있다는 조짐을 보였거든.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문학과 지성사, 1976 (40)

모든 소설은 자전적이다. 그리고 모든 자전적인 소설들은 가면을 쓰고 있다. 물론 그 가면은 춤을 추기 위한 가면이다. 춤을 추기 위해서 가면을 쓴다. 가면을 벗으라는 요구는 따라서 부당하다. 춤을 끝낼 때가 아니고는 가면을 벗지 않는 법이다. 나는 내 소설의 마지막에 이렇게 써두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글쓰기는 감춰진 것의 드러내기이다. 그 드러내기는 그러나 감추기보다 더 교묘하다. 그것은 전략적인 드러냄이다. 말을 바꾸면 그는 감추기 위해서 드러낸다. - 이승우, ‘생의 이면’, 문이당, 1995 (84)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산만하고 상상력이 동굴처럼 캄캄해질 때면 물을 보러 간다. 강변 둑을 걷거나 강이 잘 내려다보이는 커피 집에 앉아 통유리를 통해 물을 바라보곤 한다. 물은 그냥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만지거나 그 안으로 들어가면 금방 형체를 무너뜨려버린다. 그것은 물이 간섭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은 구상의 공간이 아니다. 자연은 생각 자체를 지워 없앰으로써 자연 안에 들어온 자를 강복한다. 강물 속에 문학을 담그고 나는 내 문학에게 세례를 베푼다. 물속에 잠김으로써 옛 문학은 죽고 새 문학이 태어나리라.....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세례의 일회성을 믿지 못하는 엉터리 사제다. 세계는 거듭거듭 끝없건만 문학은 낡은 채로 그냥 있다. (95)

저자 이승우는 195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울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공부했다. 1981년 ‘에리직톤의 초상’으로 <한국문학> 신인상에 당선되어 작가로서 등단했다. 여러 소설, 산문집을 내었다.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서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다수의 작품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결혼했고 남양주에 산 적이 있으며 현재는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책날개 참고)

‘맛의 기억’이라는 제목의 단행본, 2019서울국제도서전의 기념품 같은 책 속의 짧은 글에 반해 연초부터 몇 권을 연달아 읽고 있다. 처절하게 사랑할 줄 아는 젊은이인 줄 알았는데 부모님뻘 아저씨였다. ‘소설을 살다’는 소설가로 살아온 작가의 일상과 소설에 관한 생각을 담은 산문집인데 이 또한 소설 같다. 단편이거나 연작처럼 느껴진다. 3월 초에 읽었는데 리뷰를 빨리 쓰고 싶지가 않았다. 이 책을 빨리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멋쟁이 소설가 이승우님의 새 책을 또 읽고 싶다. 나 같은 보통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런 글을 쓸 수 없겠지.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Posted by 따듯한 꽃.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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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고 또 읽기/문학2020. 3. 29. 20:10

[2020-11] 삼국지 첩보전 1.정군산 암투. 허무 지음. 홍민경 옮김. 살림출판사. (2020)

초등학생 시절 5권짜리 만화책 삼국지를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다. 유비와 관우, 장비, 제갈공명, 조조 등 위, 촉, 오나라의 삼국통일 이야기에 빠져 몇 번이고 다시 읽던 기억이 난다. 성인이 될 때까지 삼국지를 또 읽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몇 년 전 경영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조조를 담은 책, ‘조조에게 배우는 경영의 기술(시그마 북스, 2016)’을 보면서 기억이 전부 옳은 건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내 기억 속 조조는 나쁜 놈이었는데 다른 시점으로 바라보니 다른 이야기가 보였다.

‘삼국지 첩보전’은 총 4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저자 허무는 중국의 미스터리 작가로 주목받았고, 오랫동안 ‘삼국지연의’를 고증하여 이 소설을 만들어냈다. ‘삼국지연의’가 양지의 이야기라면 ‘삼국지 첩보전’은 음지의 이야기이다. 1권은 정군산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군산 전투’는 219년 유비가 한중을 차지하기 위해 하후연이 지키던 정군산을 공격한 전투이며, 촉이 승리하고 유비가 촉의 첫 황제가 된 결정적 역할을 한 전투이다. 위, 촉, 오 삼국에는 자국의 비밀병기처럼 운영하는 진주조(위), 군의사(촉), 해번영(오)이 있다. 이 첩보 기관 사이의 은밀한 정보 전쟁이 정군산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베일 속 첩자로 등장하는 ‘한선’이라는 인물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신이 살펴보니 ‘춘추’에서 전대에 이미 일어난 일들을 돌아보고 하늘과 인간 세상의 관계를 깊이 있게 분석한 결과가 꽤나 놀라웠습니다. 한 나라가 도에 어긋나는 일을 하려 하면 하늘이 먼저 재해를 내려 그것을 경고하고, 그럼에도 반성하는 빛을 보이지 않으면 기괴한 일을 내려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그럼에도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재앙과 멸망이 닥치게 될 것입니다. (52)


코로나19 바이러스 전쟁(!) 시국에 ‘정군산 암투’ 책을 읽으려니 이상하게 감정 이입이 잘 되면서 200년대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음모가 가득한 세상, 잔인한 전투 묘사가 썩 유쾌하진 않았다. 그때는 시민의 인권 보장 같은 것도 없고, 정보공유도 어려웠겠지. 국가의 지도자나, 장군, 귀족 급이 아니어도 소소한 누림을 누릴 수 있는 2020년에 살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이런 소설 따위에 감정 이입해서 현재에 감사하는 작고 작은 내가 보였다.


모든 인간사는 하늘의 뜻에 달려 있으니 사람으로서 할 일을 다 했다면 그저 겸손하게 그 뜻을 기다려야 한다. (59)

Posted by 따듯한 꽃.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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